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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08. 2021

위기의 순간엔 비상정지버튼을 누르세요.

다만 신중하게 눌러야 합니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역 승강장에는 비상정지버튼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 비상정지버튼을 누르면, 엄청나게 듣기 괴로운 경보음이 역무실 안으로 크게 울려 퍼진다. 이 소리는 일단 승강장으로 뛰어가서 상황 파악을 하라는 소리다. 그리고 펼쳐지는 상황이란 보통 이런 것이다.     



1. 누군가가 선로로 떨어졌고 이를 목격한 다른 승객이 비상정지버튼을 눌렀다.

비상정지버튼을 누르면 열차방호가 되어 해당 선로로 접근하는 열차의 운행이 정지된다. 선로에 떨어진 고객님을 차분히 승강장으로 올려드린다. 구급상자를 가지고 가서 상처가 있는 곳이 있다면 지혈 또는 소독을 해드린다. 주로 만취했거나, 몸이 약한 어르신들이 선로로 많이 떨어진다.      


2. 떨어진 사람이 다행히 없다. 비상정지버튼의 울림을 해제한다.

다행히 큰일이 날 뻔했지만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선로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고, 혹시 버튼을 누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면 무언가를 목격했는지를 꼭 듣는다. 다행히 이상이 없다면 승강장에 있는 모든 비상정지버튼의 열쇠를 돌려 울림을 해제한다. 하지만 해당 역으로 접근하는 전철의 주의운전은 필수다.

    

3. 비상정지버튼을 장난으로 눌렀다. 비상정지버튼이 그냥 직원 통화 버튼인 줄 착각했다. 비상정지버튼이 그냥 있어서 눌러봤다 등.......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 고의적으로 비상정지버튼을 누른 경우 철도안전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안전은 최의 핵심 가치이다. 필요하다면 눌러야 하는 게 비상정지버튼이다. 역에서 CCTV를 감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화질도 좋지 않고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역무원이 순회하는 동안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곳을 순회하고 있는데, 순회하고 있는 곳과 반대인 곳의 선로에 승객이 떨어졌다는 고객의 호출을 받고 달려간 적도 있다. 상황을 목격한 고객의 눈과 연락이 가장 소중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소중한 고객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위험이 확실하다면 비상정지버튼부터 누르세요.

비상정지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주변 승객들이 선로에 떨어진 할아버지를 구출하려고 열심히 잡아당겼다. 하지만 하필 그때 접근하는 열차가 있었다. 목격자가 최대한 발견 즉시 비상정지버튼을 누르고, 관련 직원들이 신속하게 조치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자살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정확한 위치와 성별, 인상착의를 알려 주세요.

‘자살할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선로를 바라보면서 움찔움찔거리는 것 같아요.’라는 신고 전화를 받았다. 정확한 위치(지하철 승강장의 경우 OO행 승강장 몇 다시(-) 몇이라고 알려주시면 좋다.)와 사람의 성별 및 간단한 인상착의를 알려 주시면 좋다.

전화를 받은 즉시 승강장으로 뛰어간다. 사실 인상착의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위치만 정확히 알고 달려가면 그 사람을 금방 찾게 된다. 눈빛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 어디까지 가시는지 묻고, ‘가시는 길을 안내해드리겠다.’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안전하게 전철을 타고 가시는 것을 확인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부디 안전하게 가시기를 바라면서.

그 사람이 진정 자살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의외로 ‘그냥 철도 마니아’인 사람도 있다. 철도 마니아도 반드시 안전히 가시길 바랍니다.      


스크린도어가 있는 역에 역 직통 전화기가 있습니다.

스크린도어가 있어도 사고가 안 난다는 법이 없다. 위급한 상황을 목격했는데 역 전화번호를 모른다면 승강장 내에 역으로 바로 연결되는 전화기가 있다. 꼭 전화해서 역무원과 통화해달라.     




그동안 나의 인생에도 ‘비상정지버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멈추었었고, 다시 한번 멈출까 고민이 되는 순간도 더러 있다. 그 버튼을 누른 뒤 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는지를 누군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던 차에 역사 내 비상정지버튼의 존재가 떠올랐다.

신중하게 눌러야 하는 것만은 아는데 어느 선까지가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선인지가 난제다. 역무원의 일에 비해 마음의 일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알 수 없다. '단순한 일을 견디려면 마음도 단순해져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보지만 어느 순간 나는 움찔대며 어느 길목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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