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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May 09. 2021

취객과 역무원

경찰, 소방, 철도를 동시에 움직인 그 사람

야간 근무를 하는 역무원의 주요 고객은 취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취객을 만나는 빈도가 잦은 직업 중 하나가 역무원이다. 특히, 종점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한다면 인사불성이 되어 열차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는 일까지 추가된다.



종착 열차에서 만난 인사불성 취객

종점에서 근무할 때 취객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홀로(*같이 갈 다른 직원도, 사회복무요원도 없이 혼자인 날이었다.) 전동열차로 출동했다. 전동열차 바닥에 고이 누워있는 취객이 혹시라도 응급환자일까봐 흔들어 깨우며 상태를 물었다.


“고객님. 어디가 아프신가요?”

“(귀찮다는 듯) 끄응ㅇ으으ㅡ응”

“술을 많이 드셨나요? 어디 아프신 데 없으신가요? 아프신 곳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119 불러 드릴게요.”

“아 씨X 뭐가 이렇게 씨끄러...으으으응ㅇㅇㅇ”

“일어나세요. 안 내리시면 이 전철은 터널로 들어가요. 안 내리시면 갇힌다고요.”

“#$@#%#$%#$%”


인사불성이 된 젊은 남성을 여성 혼자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홀로 고군분투하는 나를 목격한 일반인 한 분이 도움을 주신 덕에 운 좋게 그를 전동열차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벤치에 앉을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고, 승강장 바닥에 다시 대자로 누워서 버티기 기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승강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인사불성이 된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짜증 섞인 신음소리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가짜 경고를 해보았다.


“고객님. 몸이 아프시면 119를 불러드릴 텐데, 아프신 것도 아니면서 정신을 안 차리고 역사 승강장에 계속 누워계시면 경찰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경찰과 같이 가시겠습니까? 경찰 출동하기 전에 얼른 정신 차리시고 귀가하세요.”


‘돌아오는 건 또 욕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무 기대도 없이 그냥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힘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승강장을 두리번거리다 출발할 예정인 전동열차를 찾아냈다. 좀 전까지 인사불성이었던 모습이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는 전혀 비틀거림 없는 걸음걸이로 안전하게 전철에 앉아서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노숙자

무슨 사연일지 상상도 안가는 행색이었다. 미라처럼 머리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애인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역무원은 역사의 영업 종료 후 화장실을 모두 확인한다. 남자 장애인 화장실 문을 여는데, 역사 영업 종료 전에 이미 화장실을 갔던 고객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붕대를 두른 채 다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용변을 본 바지를 올리려는 의지도 가지지 못한 채 화장실을 걸어 나와 맞이방 벤치에 앉았다. 곁에 있던 사회복무요원이 “경찰을 부를까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매번 경찰을 부르는 것도 민폐 같았다.

나는 그를 겨우 역사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역사 밖으로 나가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서 그가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모습까지 확인해야 했지만 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에게 “바지 좀 올리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바지를 움켜쥐고 힘겨운 걸음을 걸으며 지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회복무요원 함께 동행했지만 그 노숙자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위험한 일이 생길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부턴 경찰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찰을 불러주지 않으면 역사 밖으로 안 나가!”

셔터를 내리고 있는데도 나가지 않는 취객이 있었다. 경찰을 불러달라고 했다. 가까운 지구대 위치를 알려드렸지만 직접 갈 생각은 없으시다고 했다. 경찰을 불러야만 역사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러드렸다.



왜 여직원이 혼자 왔어!”

인턴 시절, 가용인력이 전부 업무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기차 안에 하차시킬 취객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 혼자 열차로 나갔더니 취객을 인계하려던 열차 안의 열차 팀장님이 “왜 여자 인턴 혼자 왔어!”라고 나를 나무라셨다.


(같이 올)사람이 없어서요.......” 


(*이 말을 입사 후에도 계속하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승강장에 단 둘이 남은 나와 취객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턴 시절이라 취객의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어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취객은 세월호 사건이 가슴 아프다며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라고 했다. 나도 그 당시 그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던 터라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울컥했다. 취객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낸 뒤 “아가씨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고 역사 밖으로 우유히 나갔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역사 밖으로 나가시는 게 맞나요? 근데 왜 열차 안에서 안 내리고 버티다가 도중하차 당하신 거죠? 그의 목적지는 미궁에 빠졌지만 역을 빠져나가는 그의 발걸음은 행선지를 아는 듯 당당했다.



넘어져 다친 취객 앞에 모인 경찰, 소방, 철도

역사 내 벤치에서 누워 자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그의 이마에는 타박상과 약간의 피가 있었다. 그를 목격한 고객이 경찰에 그를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은 119에 신고했고, 역사 직원으로서 나는 그 현장을 함께 확인했다. 고객의 인적사항을 받고 경찰과 이를 공유한 뒤 119를 기다렸고 응급조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병원에 이송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귀가하면 되는 고객이었지만 그는 귀가하지 않고 역사 벤치에서 계속 잠을 청했다. 30분을 설득한 끝에 그가 역사 밖을 나서는 모습을 경찰관, 소방관, 역무원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는 동네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역으로 돌아와 벤치에서 잠을 청했다.


“많이 취하셔서 귀가가 힘드시면 보호자 연락처를 말씀해주세요. 연락해 드릴게요.”

“연락하지 마@!#@$요. 내가 아내랑 싸워숴 지금 연락할 맘이 없으니깐. 연락처는 010-XXXX-XXXX”


나는 그가 나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곳으로 가서 보호자 연락처로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OO역 역무원입니다. 실례지만 OOO님 보호자 되실까요?”

“저 보호자 아니에요! 전 여자 친구인데. 보호자는 아니에요! 오늘 낮에도 경찰 신고가 접수됐다고 경찰이랑 통화했는데요? 전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아. 저희가 보호자 분이라고 연락처를 받는 바람에 모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여자 친구의 연락처를 하루에 두 번이나 뿌리고 다녔다는 그와 한 시간을 더 씨름한 뒤에 나는 그를 겨우 택시에 태울 수 있었다. 핸드폰도 안 가지고 다니고, 2주 전에 머리를 꿰맨 자국도 있고, 보호자 연락처도 공개하지 않고, 하루 사이에 경찰 신고를 여러 번 당한 그가 택시를 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그는 택시를 타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취한 사람이면 경찰, 소방, 철도, 택시 등(.......)을 모두 부를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나라인 것 같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일할수록 놀랍도록 불안전한 모습들을 본다.

한번 깜빡이지 않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계속 응시하던, 살기 그의 눈빛도 놀라웠다. 그런 눈빛을 보면 '그가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을까, 그가 혹시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하는 괜한 걱정이 싹 사라지면서 마음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는다. ‘같이 일할 사람이 없어 혼자 일할 일이 잦은’ 나에게 더 이상의 놀라운 일은 생기질 않길 바랄 뿐이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조금 걱정이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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