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극한직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잠 Jan 29. 2021

톱밥으로 토사물 치우는 역무원

일을 하며 알게 된 톱밥의 쓸모

저녁 10시, 승강장에서 부역장님이 토사물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다.

청소직원분들이 숙직을 하는 역도 있겠지만, 내가 근무했던 전철역은 청소직원분들이 출퇴근을 하고 계신다. 그런데 토사물이 발견되는 시간은 주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대여서 그 시간대에 토사물이 생기면 다른 고객들이 이를 발견하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한다. 나는 톱밥을 챙겨 재빨리 승강장에 갔다.


톱밥이란 무엇인가? 톱밥은 톱으로 나무를 자를 때 나오는 가루다. 하지만 역무원은 이 톱밥의 새로운 쓸모를 찾아내었다. 질어서 청소하기 힘든 토사물 위에 톱밥을 뿌리고 기다리면, 톱밥은 토사물의 수분을 흡수해준다. 그때 가루가 된 토사물을 빗자루로 쓸어 담으면 청소는 끝난다.

하지만 어젯밤 10시의 그것(!)은 톱밥으로 쉽게 해결이 나지 않았다. 부역장님이 발견한 시각보다 한참 전에 토사물이 승강장으로 방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토사물이 딱딱하게 굳어 바닥과 모서리, 벽면에 착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탕비실로 돌아간 나는 마대걸레에 물을 묻혀 승강장으로 갔다. 토사물의 양이 많아서 마대걸레가 금방 더러워졌다. 하지만 마대걸레로도 이미 굳은 토사물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30분을 씨름했다. 무얼 드시고 그렇게 엄청난 양을 방출한 것인지 토사물은 승강장의 세 지점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청소직원분들이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겨우 응급조치를 마친 나는 토사물이 가득 묻은 마대자루를 빨아서 말린 뒤 내 본연의 업무를 하기 위해 역무실로 복귀했다. 역무원 본연의 업무라는 게 무엇인지 점점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큰 자루로 얻어왔던 톱밥도 이제 바닥이 보이고 있다. 남은 톱밥마저 다 쓰고 나서 다시 톱밥을 얻어올 곳도 없게 되면 앞으로 토사물 청소는 더 힘들어질 예정이다. 코로나 때문에 그나마 취객의 숫자가 조금 줄었나 싶더니 어제는 운행이 종료된 열차에서 안 내리고 버티는 여러 취객들과 1:1로 실랑이하느라 고생도 좀 했다. 내 마음도 톱밥처럼 가루가 되어 날렸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비틀거리는 당신들은 오늘 톱밥보다 쓸모 있는 존재였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매표X이라는 악플을 받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