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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11. 2021

맨홀 뚜껑 여는 역무원

역무원이 되고 했던 예상 밖의 일

신입사원에게 수유방 청소상태 점검 업무를 가르치자 신입사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어봤다.

“진짜 수유방에 들어가야 해요?”

출근 첫날과 둘째 날, 합쳐서 네 번째 똑같은 질문이다.


“걱정 마세요. 우리 역은 수유방 쓰는 사람 거의 없어요. 혹시 수유방을 사용하는 분이 있을까봐 걱정되시면 문 앞에서 ‘남자 직원이 수유방 점검하겠습니다.’라고 크게 2회 복창해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미리 확인해보시면 돼요.”

여직원이 없을 때 여자 화장실을 점검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역무원이 겨우 한 명 또는 두 명인 지하철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다.     


“진짜 수유방에 들어가야 해요?”


내가 신입사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업무를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도 지친 나는 반복된 질문에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도 주임님 안 계실 땐 남자화장실 들어가요. 주임님도 저 없을 때는 여자화장실 들어가야 해요. 어차피 막차 가고 셔터 내릴 때 화장실과 수유방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야 하니까요.”     


아무도 쓰지 않는 수유방부터 진입 장벽을 느끼는 걸 보니 앞으로 이 분과 일할 일이 걱정스럽다. 앞으로 험한 꼴(?) 많이 볼 텐데 왠지 내가 이 분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나는 올해만 벌써 바지 내리고 다니는 노숙자를 둘이나 봤다. 역무원의 일터는 이런 곳이다.

 



강인한 나에게도 ‘이것까지 해야 하는가’ 싶은 업무가 있긴 했다. 기차역에서 담당했던 수도검침 업무였다. 수도 검침이라는 것이 결국 수도계량기에 적힌 수치만 확인해서 적어오면 되는 일이지만, 싱크대 밑에 예쁘게 붙어있는 수도계량기만 찾아서 봐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 기차역은 기차역에서 영업하는 모든 매장들의 수도계량기뿐만 아니라, 역사 밖 공터들에 있는 상수도 맨홀, 역사 밖 다른 공단 건물 안에 숨어 있는 수도계량기까지 20개에 육박하는 수도계량기를 관리하고 있었다.      


역사 안에 있던 도시락 매장들 수도계량기는 매장 뒤 편 벽과 매장 사이의 틈에 있었다. 도시락 매장들의 개량공사 전, 오래된 도시락 매장들 뒤편에는 먼지와 기름때가 가득했다. 게다가 사람 한 명이 겨우 몸을 구겨야 들어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로 제복에 먼지와 이물질을 묻히며 움직였다. 벽과 매장 사이 공간에 낀 채 지저분한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피다 보면 작고 동그란 수도계량기가 있었다.


도시락 매장들 수도검침이 끝난 뒤, 나는 역사 동쪽과 서쪽을 오가며 수도 계량기를 열었다. 검침 전 비가 내린 적이 있다면 수도계량기 맨홀에 똥물이 고여 그것을 여는 장갑 낀 손이 흠뻑 젖기도 했다. (그 이후 손에 독이 올랐는지 생전 생긴 적 없는 이상한 두드러기가 났었다.)


최고의 난이도는 역사 밖 파출소 앞에 있는 수도계량기였다. 바닥의 맨홀 뚜껑을 열면 매우 깊은 지하 바닥에 수도계량기가 있어서, 수도량이 표시된 숫자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정도였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보면 희미하게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도 이물질이 수도 계량기를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도계량기 덮개는 항상 열려 있었기 때문에 표면에 이물질이 묻은 것이다. 그렇다고 지하 깊숙이 있는 수도 계량기 덮개를 매번 덮었다 열었다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덮개는 항상 열려 있어야 했다.  

결국 나는 셀카봉에 물티슈를 잔뜩 매달아서 맨홀 뚜껑으로 깊게 깊게 넣었다.

경찰이 다가와 물었다.     

“뭐 하세요?”     


뭐 하냐고 물어보는 게 당연했다. 길바닥에 대(大) 자로 엎드려서 맨홀 안에 깊숙이 셀카봉을 넣고 있는 사람은 정신 이상자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무원 제복을 입고 있어 경찰에 잡혀가진 않았다.   


정신 이상자처럼 보이는 걸 감수하면서 힘들게 맨홀에 셀카봉을 넣고 계량기를 닦았음에도 숫자는 정확히 안 보였다. 셀카봉에 물티슈를 걸어 닦아봤자 계량기를 얼마나 닦을 수 있었겠는가. 어차피 수도 계량기는 너무 낡았고 수도 계량기의 숫자는 너무 작게 표출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내 소중한 핸드폰을 셀카봉에 고정시켜 계량기 근처로 지하 탐사를 보냈다. 지하로 내려간 핸드폰은 ‘찰칵’ 사진을 찍어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드디어 수도 계량기의 6자리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워라밸 좋다고 해서 입사했는데 야간 근무를 연속 두 번 하는 게 힘드네요.”

근무 시작 삼일째 되던 날 신입사원은 말했다. 회사 리뷰 사이트에는 우리 회사만큼 워라밸 좋은 곳이 없다고 나와 있으니 실망할 만도 했다.      

대다수의 말이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맞는 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타인의 평가만 믿고 내 인생을 걸면 안 되는 이유'다. 역무원이 ‘내 인생’이 되면, ‘워라밸에 Dog꿀’이 조건 내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부디 후회없는 선택을 하길 빈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은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단어의 앞 글자를 딴 ‘워라밸’이 주로 사용된다.


워라밸은 연봉에 상관없이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거나, 퇴근 후 SNS로 하는 업무 지시, 잦은 야근 등으로 개인적인 삶이 없어진 현대사회에서 직장이나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2017년 7월 워라밸의 제고를 위해 ‘일·가정 양립과 업무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근무혁신 10대 제안’을 발간했다. 책자에는 ▷정시 퇴근 ▷퇴근 후 업무연락 자제 ▷업무집중도 향상 ▷생산성 위주의 회의 ▷명확한 업무지시 ▷유연한 근무 ▷효율적 보고 ▷건전한 회식문화 ▷연가사용 활성화 ▷관리자부터 실천 등 10가지 개선 방침이 수록됐으며 잡플래닛과 공동으로 워라밸 점수가 높은 중소기업을 평가해 ‘2017 워라밸 실천기업’으로 선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워라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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