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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14. 2021

사회복무요원의 편지

단 하나의 위로를 받은 역무원

“누나. 그 할아버지 또 왔어요. 지금 역무실로 가고 있어요.”

사회복무요원에게 문자가 왔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소식을 전해준 사회복무요원을 만나 한 바퀴 역사 순회를 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역무실에서 역장님을 불렀다고 한다. 역장실로 들어가 역장님과 차 한잔을 마신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자 나는 역무실에 복귀했다.


“OO씨는 앞으로 그 고객이 보면 또 해코지할 수 있으니 피해 다녀요.”

팀장님의 지시였다.



그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새벽, 첫차가 다닌 지 한두 시간쯤 지난 이른 아침이었다.

역무원은 첫차가 출발하기 30분 전 역사의 영업 시작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함께 근무하는 팀장님과 과장님은 전날 밤 나보다 늦게까지 근무하셨기 때문에, 내가 먼저 나와 혼자 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통의 아침이라면, 그 시간에는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역무원은 이른 아침 역무실에서 전날의 역 수입금을 정리하고, 수입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한다. 그때 역무실로 들어온 그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철도 전화 좀 줘봐.”


“네 고객님? 무슨 일이신가요?”

“철도 전화 좀 걸겠다고. 내가 OO역, OO역 직원들을 다 아는데, 연락할 일이 있어.”

“아 죄송하지만, 철도 전화는 직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전화입니다. 급한 전화가 필요하시다면 일반 전화를 빌려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저희 직원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철도 전화로 고객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역무원 생활 일 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이 사람이 엄청난 악성민원인이라는 걸 눈치챈 것은 조금 상황이 더 심각해진 후였다. 그 상황에서 나는 이 할아버지가 회사 내선으로 다짜고짜 전화를 걸면, 이를 받게 될 역무원의 황당함만이 예상되었다. 바로 옆에 고객용 전화가 있어 수화기를 들고 “어느 역에 전화를 걸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미친년! 내가 철도 전화로 전화할 사람이 있다니까?”

할아버지가 욕설을 하자 이를 듣던 사회복무요원 한 명이 다가와 할아버지를 저지했다. 그는 '직원에게 욕설을 하시면 안 되고, 고객 전화기를 빌려드리거나 원하시는 말을 전해 드리겠다고 직원이 말을 했는데 고집을 부리시면 안 된다.'라고 설명하며 나를 도왔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역장 나와!”

언성이 높아지자, 숙직방에서 쉬고 계시던 팀장님이 제복을 입고 역무실로 나오셨다. 팀장님은 할아버지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그를 귀가시켰다. 문제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간 뒤였다.


할아버지가 다른 역에 전화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전동차에서 소음이 많이 나니 그걸 수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직접 자기가 직원 전화를 쓰겠다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른 상황이었지만, 팀장님은 그 전말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만 들은 팀장님은 나에 대해 단단히 화가 나신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크게 혼이 났다. 평소 점잖던 팀장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전동차 진동 소음 문제는 크게는 사고와도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중요한 사실은 먼저 차량에 신고하는 게 우선순위다. 고객이 전화를 걸겠다고 하면 전화를 걸어줬어야 하는데 OO씨가 매우 큰 잘못을 했다.’


팀장님께 토를 달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할아버지가 전동차 소음에 대한 내용을 말한 적 없고 그저 전화기를 달라고 언성을 높였다’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설명을 했다면 들어주실 팀장님이었지만, 그때 나도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말만 듣고 화를 내는 팀장님의 모습에 실망해서 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닫고 눈물을 뚝뚝 흘렀다.

그 모습을 본 팀장님은 내가 진짜 잘못을 했다는 확신이 더 드셨는지,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셨다.

‘내가 한 잘못은, 이 회사에 입사한 게 아닐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오전 퇴근시간까지 눈이 팅팅 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퇴근하는 전철을 타러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물을 훔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사회복무요원이 다가와 편지를 전하고 갔다. 그 친구가 말없이 주고 간 편지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주임님 억울하신 것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제가 오늘 일어난 상황 복기해서 문서에 다 적어 놨어요. 나중에 민원이 들어오더라도 걱정 마세요.’

역무원이 되고 난 뒤 받은 유일한 위로였다.




 후 할아버지는 본부 VOC 담당자와 우리 역에 수차례 민원 전화를 걸었다. 우리 역에서 전화를 받은 다른 역무원과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본사 비서실까지 찾아가 '사장 나와'라고 소리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그 할아버지를 만난 철도 직원들이 많다고 했다. ‘내가 아주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을 만났구나.’ 그때 알았다. 할아버지가 ‘내가 OO역, OO역 직원들을 다 아는데’라고 말을 했던 이유를. 상습적으로 민원을 넣고 욕을 하는 사람이었다.


본부 VOC 담당자로부터 상황을 묻는 전화가 왔다. 원래 민원이 접수되면 역무원은 그 상황에 대한 경위를 적는 ‘사실확인서’ 또는 ‘역지사지 답변서’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회복무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를 본부 민원 담당자에게 첨부하여 보냈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사회복무요원이 논리적으로 작성한 그 보고서는, 역무원이 ‘사실확인서’ 또는 ‘역지사지 답변서’를 작성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증거자료와도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 상황은 정리되었다.




“누나. 그 할아버지 또 왔어요. 지금 역무실로 가고 있어요.”

몇 번은 할아버지를 피했다. 하지만 나도 해야 할 업무로 바쁜 상황에 매번 그를 피할 수만은 없었다. 마지막 그를 만나던 날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내 할 일을 했다. 그가 역무실로 들어왔고, 그는 또 언성을 높이며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직원들과 열심히 대화를 하던 도중, 할아버지는 나를 쳐다봤고 나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웠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악성 민원인과의 만남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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