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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22. 2021

책 –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용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저자 시몬 비젠탈의 고뇌와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대인 생존자인 그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용서’를 우리가 감히 입에 올릴 자격이 있을까? 그 역시 자기 자신이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일지 고민했다.

세상에는 용서로 씻을 수 없는 오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용서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죽어 가는 나치 장교 앞에서 고뇌하는 유대인의 모습만이 나에겐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었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치 장교를 통해 ‘용서를 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학살한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치 장교는 수용소의 ‘어느 유대인 한 명’이었던 저자 시몬 비젠탈을 선택했다. 그것이 과연 용서를 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첫째, 진정한 참회로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 장교는 죽음 앞에서야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피해자를 생각한 진정한 참회를 수반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용서를 구한다고 볼 수 없다. 둘째, 나치 장교가 진정한 참회를 했다고 가정한들 그는 이미 용서를 구할 자격을 잃었다.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피해자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다.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치의 대량 학살이라는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할 수 있는 죄인지도 모르겠다. ‘합리성’에 의해 본디 용서는 ‘선(善)’이나, 용서는 ‘선(善)’이라는 합리성만으로 대량 학살을 용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악(惡)’이다. 동정심 없는 합리성이나 합리성 없는 동정심은 모두 무용지물(p.348)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렇게 어떤 죄는 용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피해자가 자기 자신의 슬픔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람으로서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p. 311. 용서란 우리 스스로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슬픔을 벗어던지는 것인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유대인 한 사람이 나치를 용서한다는 것은-그럴 리는 없겠지만-(중략) “이제 그 일로 인해 당신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란 오히려 이래야 한다. ”당신이 한 일은 참으로 야비하고, 차마 정상적인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나는 당신이 나를 ‘유대인 전체’로 규정하고, 또 그로써 만족하게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을 거부할 뿐입니다. " 그렇게 하면 그 나치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양심에 속박되어 있을 것이고, 유대인 자신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용서를 해달라는 나치 장교 앞에서 ‘침묵’한 시몬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순간의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치 장교의 어머니를 수소문해 찾아간다. ‘우리 아들은 참 착하고 성실했어요.’라고 아들을 추억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의 악행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시몬이 그를 용서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은 용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의 아드님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뿐이라 생각한다. 시몬 역시 수용소에서 고통받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나치 장교에게 학살당한 사람을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p.284.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왜냐하면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지. 사실 그는 유명한 랍비가 아닌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거란다. 그러니 그 상인한테, 나 말고 그 이름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말해 주려무나.”


용서는 역사와 함께 이루어진다.

제대로 용서하는 일과 용서를 구하는 일 모두 삽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처단하는 일이 앞서야 하기 때문인데, 이를 처단하는 것에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월의 흐름 안에서 피해자들도 가해자들도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이를 그저 ‘죄의식’ 정도로만 삼는 후손들과 역사적 기록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란 제대로 된 역사를 남기고 이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용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다음 기회가 없는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지만, 살인에 침묵한 방관자들의 죄는 역사 앞에서 다음 기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피해자를 찾아 속죄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역시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는 살아 있는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다. 그리고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속죄할 기회가 있다.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단지 할 기회만이 있다.)

진정한 속죄를 위한 방법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제대로 된 역사로 쓰는 것이다. 

일본에게 말하고 싶다. 용서를 구할 대상이 살아 있을 때 용서를 구하라.




p.348 동정심 없는 합리성이나 합리성 없는 동정심은 모두 무용지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비젠탈에게 동정심만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 공허한 용서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한 용서란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대로 합리성만 있었다면, 그는 그 SS대원이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고 비인간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합리성 덕분에 동정의 감정이 감상주의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었고, 동정심 덕분에 섣부른 합리성으로 인한 비인간적 행동이 억제되었던 것이다.     


p.350 섣부른 용서는 악을 희석시킬 뿐     


p.363 랍비들은 이렇게 말한다. “잔인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결국 무고한 자에게도 무심하게 마련이다.” 결국 용서도 폭력이 되는 것이다.     


p. 398 우리는 제아무리 나쁜 사람에게도 선한 본성이 남아 있다고 본다. 단 한 조각에 불과한 금이라도, 심지어 땅속에 묻혀 있다 해도, 금은 여전히 금이기 때문이다. 일단 흙을 걷어 내고 보면 금의 진정한 본성이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불교 신자는 이렇게 말한다.

“악의 장점이 하나 있다면, 씻어서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서는 면죄가 아니라,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에게 내적으로 변화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략)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용서가 필요한 까닭은, 그러한 적의나 악의나 증오가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p. 454 만약 우리가 복수만을 위해 정의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고립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용서란 뭔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 정치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용서가 없다면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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