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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Sep 19. 2023

3년간 활동한 유료 독서모임을 탈퇴하며

ㄴfeat. 술레바리

사회적 거리 두기로 zoom을 이용해 온라인 독서모임을 하던 시절부터 활동하던 유료 독서모임이 있었다. 모임을 통해 개인적으로 많이 성장했다. ‘책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 가서 쉽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느낄 만큼 겸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선택한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는 일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색다른 독서 경험이었다. 수없이 10km를 달렸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달린 최초의 순간이 진정한 첫 완주의 순간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내가 골랐다면 평생 고르지 않았을 책을 읽으며 감동받 순간들이 처음 책과 제대로 만난 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읽는 모임도 사람이 모이는 곳인지라 좋지 않은 술자리 문화, 좋지 않은 술버릇을 가진 문제 인물들은 잔존했다. 어떤 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모임장이 다른 모임원의 허벅지를 만진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유료 독서모임 플랫폼의 공지사항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는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 뒤풀이가 끝나고 같은 방향으로 귀가하던 모임장이 팔목을 더듬은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반사적으로 강하게 팔을 흔들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고 그는 즉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불쾌한 나의 표정을 본 그는 말했다. ‘제가 술을 마시면 스킨십을 하는 버릇이 좀 있어요.’  한 번의 실수였을 수도 있는 일. 나는 그날의 기억을 나만의 불쾌했던 경험으로 조용히 묻어 두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나만 겪은 일, 한두 번의 일이 아니라는 건 곧 알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른 모임원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독서모임 준비에는 소홀해도 뒤풀이에서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술을 흡입하는 그. 술을 매개로 다른 모임원들에게 스킨십을 하거나 툭툭 때렸다고 한다. 매번의 술자리마다 본인이 직접 제작했다는 질문 카드를 꺼내 대답하지 못하면 술을 마시는 게임을 진행했다. 그 질문 카드에 적힌 질문의 수위는 딱 그 사람의 수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흥선대원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모임장을 알게 되었다. 남녀 간의 친구관계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극도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 주제에 대해서는 척화비를 세우겠다고 말하는 그다. 나는 그 주제에서만큼은 다른 관점이었지만 보수적인 모임장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늦게까지 뒤풀이 자리에 남게 되었던 날이 있었다.

뒤풀이가 끝나고 모임원들이 각자 택시를 잡고 다 떠나자 아직 택시를 잡지 못한 그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남과 여는 유별하다고 생각할 매우 보수적인 그가 나를 택시로 안내해 주려는 듯 나의 팔목을 잡고 끌다가, 슬며시 팔짱을 꼈다. 남유별을 주장하던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에 실망했다.


높은 가격의 모임비를 받는 유료 독서모임 플랫폼에서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원치 않는다면 나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고, 서로를 **님이라 지칭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오래 알고 지낸 이들에게도 대쪽같이 나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좋은 취지와 신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임에서 가장 권위적인 사람은 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 중에 소위 마가 뜨는 걸 싫어하는 그는 토론에서 자기의 지식,능력, 부모의 재산을 과시하는 편이었고, 다른 모임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에소홀했다.

특히 그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의 술값을 빼고 n분의 1 계산을 하는 게 복잡했다며,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술을 마셔달라는 말을 했다. 편하게 n분의 1을 할 수 있게 술을 좀 마셔주세요. 1차만 가신 분도 2차까지 포함해서 계산할 테니 가능하면 2차까지 가 주세요. 

이전의 뒤풀이에서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들도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술을 잘 마시던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술을 권하는 모임장과 한 모임원의 소맥잔에 소주를 잔뜩 탄 뒤 사악한 미소로 술을 건넸다. '못 마시는 사람들 먹이지 말고 당신들이나 잔뜩 마셔라.'


꼰대스럽게도 나는 오랜 시간 궁금했다. 대체 당신은 몇 살이길래 우리 회사 본부장님보다도 무섭게 행동할까. 마지막 모임의 뒤풀이에서 나는 나이 이야기를 꺼냈다. 젊은 세대 같다고 돌려서 좋게 좋게 물어볼 심산이었다. 술자리의 분위기 화기애애했다.


“내가 몇 살인줄 알고 어리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내가 나이 많으면 어쩌려고.”

그는 특유의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날 이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나는 3년간의 유료 독서모임 플랫폼을 탈퇴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독서 토론 중 따듯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 주신 분들과 더 이야기해보고 어 다시 참여했건만, 그 사람들은 뒤풀이 자리에 가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은 많지만 좋은 사람들하고만 지낼 수 없는 것이 모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 자리에 계속 남는 한 나도 나이 이야기를 꺼낸 꼰대, 악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다. 나이를 공개하지 않는 좋은 취지도 무용지물인, 평등하지 않은 모임이었다. 결국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는 독서모임과 이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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