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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Oct 28. 2023

위대한 독서 빌런

책이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않는다.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환상의 색채를 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수희, '온전히 나답게' 중에서

"독서 모임에도 빌런 있지 않아요?"

독서 모임을 오래한 나에게 어떤 분이 물었다. 본인은 몇 개의 모임을 해 보았는데 항상 빌런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대답했다.

아직 빌런이라고 할 정도의 사람은 못 봤어요. 기본적으로 책 읽는 분들이라 어느 정도의 상식과 교양이 있어서 그런지.


하지만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독서 빌런'이 한 명 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에게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았던 독서 빌런. 그를 통해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성실한 사람이 다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차라리 책을 아예 읽지 않는 좋은 사람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은 사람은 자기 그릇 안에서 노는 존재고 책이 그 사람이 가진 그릇 자체를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중독을 먹고사는 사람

그는 술과 담배, 그리고 책에 빠진 사람이었다. 자신을 '글밥을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프리랜서 기자였다. 모임에 참여하기 전에 독후감을 올리느라 연락에 답장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가 쓴 글들 중에 마음을 움직였거나 인상적이었던 글은 사실 없었고, 그래서 그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가끔 인터넷 신문에 뜨는 '뇌피셜 기사들'의 주인이 왠지 그인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부끄러운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봐 굳이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예의를 강조하지만 불친절한 사람

그는 상대의 눈을 맞추고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기본적인 걸 어려워했다. '이 사람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타인과의 일대일 상황을 어려워했다.

'표정은 무섭지만 알고 보면 츤데레'라고 그 앞에서 그를 추켜세워도 봤지만 그건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나의 희망사항이었다.

슬프게도 그는 '츤데레였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냥 거만했던...'사람이었다.

고개를 숙여 상대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그에게서 결국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일단 사진을 본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의상' 소개팅에 반드시 나간다는 예의론자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여자에게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저 말 좀 할게요! 말 좀!'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합리화해야 편안한 사람

그는 자신의 '불안'이 자신의 능력의 원천이라며 자신이 담배 피우는 것도 그 불안과 관련이 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 그가 등장하면 방금 피고 온 담배 냄새가 났다.

불안이 많다는 그도, 특유의 딱딱한 표정을 풀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때가 있다. 술을 마셨을 때였다. 술을 마시면 눈을 맞추고 찐득한 미소를 짓기도 하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은근슬쩍 스킨십을 하기도 하고, 뜬금없이 팔짱을 끼기도 해서 사람을 의아하게 했다.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일반적인 식사 자리나 커피 마시는 자리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술자리를 선호해서 '저렴하게, 술을 오래 마실 수 있는' 노포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항상 자신의 취향을 말하고 그 취향대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취향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는~ 미식을 좋아하는 분들이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소개팅에서 술을 마시러 항상 가요.

는~ 분위기 있는 그런 곳 몰라요. 맛집 몰라요.

는~ 식당 같은 거 알아보고 정하는 거 잘 못해요.


이런 말을 항상 듣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술집에 있었다. 그의 모임에서 N분의 1을 한 금액은 항상 많았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먹은 건 없는데, 술값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모임의 특성상 갈 곳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술을 안 먹는 사람들에게 술을 먹어달라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그래야 N분의 1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답을 아는 사람

그는 답정남이었다. 발제문을 잘 만들어오던 그가 가끔은 답을 정해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발제를 해온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과 결혼에서 경제적인 가치가 중요합니까.]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 그는 말했다.

-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희 부모님은 성공한 귀농인으로 TV에 나올 만큼 돈을 많이 버셨고 그래서 결혼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독재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독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말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해 보고 인생을 살아보니 박정희의 독재는 이해가 되기도 해요.


[당신이 판사라면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계엄군을 어떻게 처결하겠습니까.]

엄하게 처결하겠다는 의견과 계엄군은 지시에 따른 것이라 무죄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는 무죄라는 의견에 힘을 실었다. 토론의 진행자인 그는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답을 지지하기 위해 또다시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해 보고 인생을 살아보니...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

평소 그의 행동들과 발언들을 듣다 보면 그는 과연 얼마의 인생을 산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묻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볼드모트의 이름을 말하면 안 되듯이 그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금기이다.


큰 사이즈의 캔맥주를 놓고 술을 마시며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을 독서모임의 독재자이자 독서빌런인 그를 생각한다. 다 아는 듯 말하는 특유의 태도와 문장력 덕분인지 이상하게도 그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가슴에는 재능이 없다고. 그의 글에는 가슴이 없다. 그는 자신이 직업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 또 합리화를 시작한다. '다른 재능은 없는데 가슴에 재능이 있다'는 말 칭찬아닌 것 같다는 그에게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책이 사람을 성장시키지는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책은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창이 아니다.


# 소화하기 나름

그는 '위대한 개츠비'를 인생작이라고 꼽았다. 그가 꼽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데이지의 속물근성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게 그의 그릇과 딱 맞다고 생각했다. 허세가 많은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는 속물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속물들과 어울려서 허세가 많아진 것이거나.


아무리 좋은 책도 그 사람의 그릇만큼만 소화는 법다.

결국은 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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