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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우 May 12. 2022

잠을 흉내내는 밤

 




잠을 흉내내는 밤



 당신 안녕한가요. 나는 대체로 안녕하고 이따끔 오늘 같은 날이면 안녕하지 못해요. 왜냐면 정말이지 마음이 아주 힘들었던 오늘, 우연히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계정을 되찾았거든요.


 연애의 기억이란 것은 서로 사랑할 때면 대개 비슷한 모양일 테지만, 이별 후에는 처참히 다른 모양으로 그려지기도 하잖아요. 사실 아직도 우리라고 썼다 나라고 고쳐쓰는 일이 잦아요. 이런 날엔 매번 당신을 이겨내는데 실패해서 잊은 듯 살다가도 불현듯 잠겨버립니다. 박제된 피드에는 낡을대로 낡아 꺼내보기에도 민망한 당신에 대한 감상이 탈출구를 읽어버린 방처럼 고여있어요.


 한 번쯤 인생에서 이것을 잃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잃고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어요. 언젠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다며 호기롭게 다짐하기도 했지요. 그 때의 나는 젊고, 또 강했으니까요. 이젠 그럼에도 당신께 다시 돌아가진 않겠다고 스스로를 매어두고 있으니 결국 나는 무엇도 지키지 못한 셈이네요. 그날의 고백만은 당신이 기억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이미 많지만 이건 조금 더 민망해서요.


 죽다 살아와서도 서로를 할퀴던 알 수 없는 연애의 감정 속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고, 내가 아닌 당신께 방향을 묻곤 했어요. 이것이 정말 우리가 가야할 길이 맞느냐고. 여유가 없었나봐요. 당신이 생각하던 나보다 당시 나는 더 아픈 사람이었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고 하면 믿어질까요. 이제사 모든 걸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벌써 한참이나 늦었다는 것을 알아요.


 우연히 당신을 마주친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자주 생각했어요. 당신께 주고싶었던 많은 문장들 중 딱 한마디만 건네야 한다면 그건 사과도, 미움도, 그리움도, 미련도, 사랑도 아닌 감사일 거에요. 시기를 놓친 다른 고백 대신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어요. 예고없이 당신의 일상으로 끼어든 내게 청춘의 한 시절을 내어주어 고마웠어요. 진심으로요.


 사실 친구와의 대화 중에도 종종, 혹은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해질녘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그것도 아니라면 깊은 밤중에도 문득문득 당신을 만나요. 그런 날이면 나는 이렇게 잠을 흉내내는 밤이 길지만, 내일이면 다시 당신을 딛고 갈 거에요. 요즘 나는 딱 이정도로 안녕히 살고 있어요. 당신도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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