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일 글쓰기
박완서는 나의 영웅
한밤중 박완서의 단편을 읽다가 말 그대로 전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일이 있다. 당장이고 뛰어나가 누군가와 내가 방금 책을 읽다가 느낀 것을 나누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다시 원래 누웠던 소파에 누워 그저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서른아홉의 나이에 박완서의 단편이 묶인 전집을 사서 몇 달간 재미나게 읽었다. 난생처음 나를 위해 산 전집 세트였다.
책장에는 언제 산 지 모르는 박완서의 장편과 산문집도 몇 권 있었다. 책을 읽자는 구호를 앞세운 오락 프로그램이 유행이었을 때 사 둔, 아주 오래된 책이었다.
예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읽었던 건지 다시 펼친 오래된 책은 모두 새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조금은 낯설지만 어딘지 정겹게 들리는 책 속의 표현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가끔은 읽는 것만으로도 뒤통수가 따끔할 정도로 부끄럽고 속된 인물들을 만나며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독자를 울리겠다는 얄팍한 의도가 전연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담백한 감정 표현 앞에서 속절없이 눈물샘이 터진 적도 여러 번이다.
박완서의 책을 찾아 읽으며 전업주부였던 그녀가 40세 되던 해 쓴 첫 작품 <나목>을 여성지에 투고해 당선이 되면서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는 게 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한 계기였다. 나도 할 이야기가 있고 그걸 써야겠다고 어렴풋이 마음먹게 된 순간이었다.
등단 후 작가는 여성 정보지나 화장품 회사 사보에 실리는 짧은 분량의 소설, 주로 가정주부들이 읽을 만한 결혼 생활과 자식 교육, 자잘한 로맨스 등 언뜻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를 몇 년간 써왔다.
그런 짤막한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책을 보고 어쩌면 나도 이런 식으로 써볼 수는 있겠다,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사소한 사건에 대해, 비루한 스스로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썼다. 내가 처음으로 써본 ‘이야기’였다.
어제 오후, 할 일이 없고 인터넷 연결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했다. 책장을 훑다 박완서의 대표 산문을 묶은 책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읽은 책인데,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위치까지 떠올랐건만 내용은 또 새로웠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글감을 이리도 멋지게 글로 써내다니. 바로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제 겨우 어디 가서 꺼내놓지도 못할 글을 쓰는 주제에 대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런 바람을 갖다니. 꿈꾸는 건 자유라지만 내가 생각해도 정도에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생각이었다.
책을 읽고 노트북을 열어 내가 그간 써온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어째 요즘 쓴 글보다 예전에 썼던 글들이 더 좋게 느껴졌다. 요즘 글이 잘 안 써진다며 한숨을 몰아쉬고 자리에 누웠다. 안 쓰고 있다는 자괴감이 지나니 열심히 쓰고 싶다는 열망이 떠올랐다.
책 읽고 쓰고, 영화 보고 쓰고, 사소한 일 떠올리며 쓰고, 단편이건 장편이건 일단 쓰고 싶다. 쓰고 싶다는 말만 하지 않고 진짜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제부터는 정말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