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고
아버지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짧은 글의 결론은 결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리란 조금은 슬픈 확신이었다.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어떤 글을 썼을까, 그리고 그의 글은 어떤 결론(결론 같은 게 있다면)에 이르렀을지 궁금한 마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린 하루키와 아버지는 집에 모여든 고양이의 숫자에 부담을 느끼고 그중 한 마리를 버리기로 작정한다. 부자가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고양이는 둘을 앞질러 먼저 집에 도착한 후였다. 하루키는 돌아온 고양이를 보고 아버지가 조금은 안심했음을 느낀다.
아침마다 불단 앞에서 열심히 경을 외우던 아버지의 뒷모습도 하루키가 기억하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그 일을 ‘업무’라고 표현하며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딘지 엄숙한 분위기와 강한 집중력 때문인지 하루키는 아버지에게 누구를 위해 독경을 외우는지 끝까지 캐물을 수 없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한 사이건만, 아들은 아버지를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나 역시 아버지와 터놓고 이야기를 하거나, 궁금한 걸 솔직히 묻는 것보다는 그저 아버지의 말이나 행동에서 단서를 찾고 혼자 상상을 하는 편이었다. 하루키의 부자 관계는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이 되어서야 하루키와 아버지는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며 아버지와 화해 비슷한 것을 한다. 그리고 아들은 ‘추측’만 가능하던 아버지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하지만 그 과정도 쉬운 건 아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성격과 삶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유년 시절의 사건(동자승으로 보내진 절에서 적응을 못 해 집으로 돌아옴)이나 난징 함락과 같은 전투에 참전한 아버지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구체적으로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폭력을 경험했을지는 여전히 추측만 가능하다.
하이쿠를 즐겨 쓰고 문학에 뜻이 있던 아버지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교사의 길을 걷는다. 좌절된 꿈 때문인지 술을 먹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의무를 다한다. 공부에 재능이 있던 아버지에게 실망감을 안겼다는 하루키의 부채감 또한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해 추적하는 과정에서 하루키는 아버지와 매주 일요일 영화를 보았던 일이나 평생토록 특정 야구팀의 팬이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같은 사소한 체험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말한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글을 써보려 했다. 하지만 함께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깨달음만 얻었다. 하루키의 책을 읽고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어려운 만큼 의미도 크다는 걸 다시 느낀다.
추측에서 추적을 넘어 이해로 가는 과정에서 잊고 지내던 소소한 추억을 기억해낸다면, 아버지와 연결될 작은 무엇하나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지 않을까.
하루키는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죽음을 앞둔 90세의 나이가 돼서야 아버지를 마주했다.
아버지와 마주하는 일은 그토록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인가 보다.
아버지에 대해 쓰는 일을 시작해야겠다. 아니 그 전에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부터 더는, 미루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