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주5일 글쓰기

by 김모씨


글쓴이 : 김모씨



얼마 전 디키즈 카고 팬츠를 입은 제니 사진을 보았다. 혹자는 말한다. 요즘 거리에 나가면 90년대 인기 그룹인 영턱스클럽처럼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2000년대 초반 옷장 가득하던 아이템들을 멋지게 소화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니 괜히 버렸다 싶은 옷들이 떠오른다.

20대 초반에는 옷 사는 재미로 살았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친구와 밤새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비닐 봉투가 가득차게 쇼핑을 한 후, 첫차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오곤 했다. 너도나도 교복처럼 입는 유행 아이템도 꼭 사야 직성이 풀렸다. 그 많은 옷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유행이 지나면 미련 없이 버렸다. 좋은 걸 사서 마르고 닳도록 입기보다는 그때그때 시즌별로 옷을 한 무더기 사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헌 옷 수거함으로 직행했던 옷들을 되찾고 싶다. 이제부턴, 정말 아니다 싶은 옷도 버리기 전에 다시 보리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생각. 도대체 작년 여름(겨울)에는 뭘 입고 살았던 걸까. 겨울을 앞두고 입을 옷이 없자 단골 쇼핑몰을 찾았다. 기모 안감을 덧댄 겨울용 청바지와 상의 두어 벌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올겨울은 이걸로 버텨야겠다.


룸메이트는 옷이 많다. 체크무늬 셔츠만 해도 여름용, 간절기용, 겨울용 각각 네 장씩은 되는 것 같다. 똑같은 디자인의 반바지를 색깔별로 구비 해놓고 아침에 뭘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아낀다. 마치 스티브 잡스같다.

매일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는 내게 어느 날 지인이 말했다. 자기 옷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같이 입어도 된다고. 그날부터 그의 옷장을 탐하기 시작했다.

지인의 옷들은 모두 기본 아이템에, 꽤 오랜 시간을 입어 적당히 낡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처음엔 티셔츠 한 장으로 시작해, 바지, 외투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지인은 서너 개의 옷을 돌려 입기 시작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지난 주말, 지인이 본가에 들러 겨울옷을 한 보따리 가져왔다. 해외로 이주한 여동생 옷까지 받아 짐이 상당했다. 지인이 스웨터나 목폴라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쪽으로 눈길이 멈췄다. ‘저거 입고 싶다. 나한테 딱인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지인이 먼저 권하기 전에 내가 물었다. “이거랑 이거, 나 입어도 돼?” 순간 그의 얼굴에 약간의 망설임과 함께 ‘이건 아닌데......’싶은 표정이 떠올랐다.


남의 옷장을 뒤지며 이것저것 조합해 입는 재미에 빠져 염치를 잊고 살았다. 언제나 입을 옷이 없던 빈 옷장은 언제부턴가 지인의 옷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옷을 쉽게 사고 버려서 옷장 속엔 언제나 몇 해 지나지 않은 옷들만 남았다. 나와는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진 친구의 옷장엔 세월과 추억을 간직한 옷들이 가득했다. 훔쳐 입은 건 그의 옷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간직하는 것, 시간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지인의 옷을 입고 있다. 도톰한 체크 셔츠에 회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채다. 철이 바뀔 때마다 옷을 사고 버리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유행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언제까지 지인의 시간을 훔쳐 입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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