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by 김모씨

얼마전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무심코 집어든 책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어진 아버지(아마도 김약국) 아래 개성 강한 자매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짐작하고 읽기 시작한 책은 기대와 많이 달랐다.

자매가 둘도, 셋도 , 넷도 아닌 다섯이건만 어찌 그렇게 불운을 몰고 다니는지 읽을 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짧게 말해 첫째는 과부요, 둘째는 정혼자의 변심으로 노처녀, 셋째는 어찌어찌하다 광녀가 되고, 넷째는 고생만 하다 일찍 죽는다. 집안은 일찌감치 망하고 책의 중반쯤 어머니는 살해를 당하고 아버지는 결국 위암으로 돌아가신다.

어제 자리에 누워 친구에게 방금 책장을 덮은 <김약국의 딸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이렇게 불행한 가족 이야기를 썼을까,에서 시작해 운명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다섯 자매가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그럼, 너는?"이라는 송곳같은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 다분히 공격적이라 느꼈는지 "무슨 소리냐, 나는 운명을 개척하며 산다"로 시작된 자기항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방금 <리턴 투 서울>을 봤다. 주인공은 어릴 적 프랑스로 입양되고 성인이 되어 한국을 찾은 여성이다. 프레디(주인공)는 매력적이라고 느껴질만큼 굉장이 독특하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와 그렇지 못한 스타일과 사고방식이 그녀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입양기관을 통해 친부를 만난 후 몇 년에 걸쳐 프레디는 한국에 재방문한다. 영화의 끝무렵즈음 프레디의 일행이 프레디와 한국의 인연을 '운명'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프레디는 금시초문의 표정이다.

이쯤에서 밝히는 이 글의 결론. 운명같은 건 없는 거다. 내가 화순에 내려와서 빵을 배우게 될 운명이었을까? 아니, 그런 건 없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내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살아갈지 고민이 많았던 요즘이다. 운명이 나를 이끄는 데로, 어찌되었든 일이 되어가는데로 나를 맡겨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왜나햐면 나는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우주가 정해놓은데로 살아가기엔 참을성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24년 나는 올해 그랬던 것처럼 운명을 개척하느라 무척이나 바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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