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모씨 Jan 04. 2024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지음

 1.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바라는 것을 본다. 정확히는 그렇게 사는게 가능해졌다. 편향은 온라인에서 우리가 드러낸 자기 정체성과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엉망이기에 우리의 소망 역시 엉망일 수 있다는 걸 잊고, 자신의 엉망이 반영된 볼거리를 편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기술이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53쪽

2.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 나와 전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자신의 자리로 끌어와서 비슷한지 아닌지 재보고 맞춰보는,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공감을 넘어 온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자리로 다가서는 공감 역시 가능하다는 믿음. 자기와 남을 포갤 때 생기는 낙차는 그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에야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155쪽

3. 우리는 인종과 언어, 계급을 모두 뛰어넘어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249쪽

4.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253쪽

5. 때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본다. 이미 최악의 고통과 끔찍한 상실을 겪어낸 뒤에 기자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공론화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미 그이 세계는 다 망가져 폐허가 됐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바늘 자국 없이 이어내는 데 곤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잔해 속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내가 만난 사라 중에선 불법 약물에 어린 사춘기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그랬고, 침몰한 배와 함께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그랬으며, 잔악한 집단학살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그랬다. 자신의 고통을 대중 앞에 꺼내든 사람은 취약해진다. 사적인 감정은 스스로 처리하라는 나무람이나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짐짓 이성적인 체하는 반응도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반복 재생하면서까지 해내려는 일이 무엇인지 짚어본다면 이런 말들은 힘없는 잡음에 불과해진다.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의 혼돈 속에서 그들은 뒷이야기를 새로 쓰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다음 고통을 막기 위해. 이들의 선한 의도는 언론이 좋아하는 영웅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오랫동안 바라봐야 하는 건 그들이 나눠주고 이식해 준 기억 자체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슬퍼하려면 기억을 나누어야 하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래 슬퍼하려면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261쪽

작가의 이전글 Carol & the end of the worl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