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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Jan 04. 2024

Carol & the end of the world

  요즘 좀 우울한 것 같다. 우울의 원인을 찾아보다 요즘 내 생활에 눈에 띄는 변화가 하나 떠올랐다. 그건 바로 여유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주4일 광주를 오가며 수강하던 제빵 수업이 지난주 종강했고 그보다 몇 주 전 오후에 하던 도서관 봉사와 주 3일 파트 타임으로 일하던 빵집 일도 마무리되었다. 춥다는 핑계로 날마다 가던 수영장을 쉰 지도 꽤 되었다. 그러니까 요즘 나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정신없는 일정에 지치던 때는 무엇보다 여유 시간을 갖고 싶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아침에 좀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고 못 보던 책과 영화도 보고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여유 시간이 주어지니 나도 모르게 우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라는 애는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지, 오랜만에 찾아온 텅 빈 하루가 원인을 찾기 힘든 우울한 감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니 그저 한숨이 나왔다. 

 우울이라는 나락에서 나를 건져 올릴 무언가, 그러니까 새로운 ‘할 일’이 필요했고 책에 빠져보려 노력했다. 영어 점수를 만들겠다며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좀처럼 들어가 보지 못하던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시리즈를 찾아냈다. 여기까지가 바로 내가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carol & the end of the world)>라는 시리즈를 만나게 된 계기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케플러란 행성과의 충돌을 앞두고 지구는 종말을 약 7개월 남짓 앞두고 있다. 사람들은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파티를 즐기거나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탈을 일삼는다. 남은 생애 동안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거부하겠다는 듯, 알몸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이도 있으며, 아무도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고 타인의 삶의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주인공 캐럴은 그런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꼬박꼬박 신용카드 대부금을 지불하던 캐럴은 어느 날 은행장으로부터 ‘더는 빚을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일을 받고 망연자실해 한다. 그 메일을 쓴 은행장은 외딴 휴양지에서 온몸에 타투를 한 채 벌거벗은 몸으로 호수로 뛰어든다. 

 간병인과 삼각연애 중인 부모님은 그런 캐럴이 걱정이다. 사려깊은 딸 캐럴은 요즘 서핑을 다닌다며 부모님을 안심시키려하지만 서핑은 물론, 급하게 시작되는 로맨스나 친구가 권하는 티베트 여행에 캐럴은 조금의 흥미도 없다.     

 어느 날 캐럴은 지하철에서 한 여인을 따라 건물에 들어선다. 그곳 19층에는 지구의 종말에 아랑곳없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풀타임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일하는 행정보조원으로 가득한 회계부가 자리 잡고 있다.

 얼떨결에 회계부에서 한자리를 얻은 캐럴은 아침에 일어나 당연하듯 출근을 하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서류를 정리한 후 퇴근한다.      

 아직 시리즈의 반밖에 보지 않아 지구가 정말 멸망하고 말지, 주인공은 종말의 날까지 회계부로 출근을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렴풋이 종말을 앞두고 여행이나 일탈에 심드렁한 캐럴과 아침에 당연하듯 출근하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계부 직원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 볼 뿐이다. 

 에피소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지구의 멸망이 7개월하고 며칠 남았을 때 난 무엇이 하고 싶을까 하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여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혹은 당장 이번 주말이나 다음 달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으로 갈음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난 무엇을 하며 하루를, 인생을 채우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 블랙 코미디 같다고 평한 이 시리즈는 곳곳에 웃음 포인트를 갖고 있어서 영상을 보다 빵 터질 때가 종종있다. 

 특히, 캐럴이 회계부 직원 중 가장 먼저 인간성을 확인한 도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상 시니컬한 듯 보이지만 언뜻 보이는 도나의 인간적인 면이 좋다. 평생 내 가게를 갖고 싶다는 소망으로 살아온 도나, 결국 다섯 아이를 독박 육아로 돌보며 네일숍을 차린 도나. 그리고 그게 다 무슨 의미였는지 모르겠다며 자조하는 도나. 나는 도나가 정말 좋다.     

 방금 본 에피소드에서는 회계부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던 데이비드가 사무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이를 발견한 캐럴 3인방이 시체를 트렁크에 싣고 다니다가 결국 유해를 회계부 건물 옥상에서 날리는 내용이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 듯 보이는 삶을 산 데이비드를 추모하는 방식은 이렇다. ‘그는 나에게 스테플러를 빌린 후 항상 돌려주는 사람이었어요.’, ‘언젠가 한 번 회사복도에서 마주하게 된 그에게 비켜달라 하니 그가 비켜주었어요.’, ‘당신을 추모합니다. 그런데 당신 와이프는 좋은 사람 같지 않아요. 더 좋은 곳에 가길 바라요.’, ‘곧 만나요. 데이비드.’.


 누군가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고 싶고, 나 역시 의미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으며 때로는 영원히 기억되고 싶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일까.

 적어도 사람들이 데이비드를 보내주는 방식에서 진심이 느껴졌고 그의 죽음으로 냉담한 마음들을 한자리로 모였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무언가 ‘distraction(한 에피소드에서 마음에 남았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주의를 딴 데로 돌릴만한 것을 찾는 일을 평생 반복해오다, 그 과정에서 만난 <carol & the end of the world> 다음 화가 무척 기대된다. 

 오늘은 두 편의 에피소드를 시청했고 무언가 쓰고 싶은 기분이 들어 이렇게 글도 한 편 완성했다. 남은 오후는 약간의 일과 영어 공부, 독서로 채워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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