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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Jan 15. 2024

주말 숙제

육아일기

“앞으로 나한테 00이 숙제시키지 마.”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걸거나 문자로 묻는 대신 짧은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지난 주말 나는 화순에 남고 아이 혼자 상경해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육아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찾아오는 감정은 아이가 나의 통제밖에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유지하고 있는 독서와 학습 습관, 영상 시청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까지 모두 허사로 돌아가면 어쩌나, 아이가 2박 3일 동안 영상물과 무절제한 생활에 푹 젖은 채 돌아올까 봐 두려웠다.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남기려 아이에게 숙제 두 가지를 전달했다. 내 딴에는 줄이고 줄여서 숙제 양을 정했다. 수학 문제집을 하루 두 쪽 풀고 아빠와 오답 풀이하기. 종이에 따로 적어 아이와 아빠에게 전달하는 것도 모자라 배웅하는 기차역에서 아이를 붙잡고 거듭 당부했다. 언제나처럼 아이는 당당하고도 자신 있는 반응이었다. “알겠어! 엄마.”      


 방학 기간이라 평소보다 일찍 기차에 올랐다. 이른 저녁 시간 아이는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양이 많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자리를 잡고 앉아 20분이면 충분히 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도착한 첫날 숙제를 마치고 마음 편하게 나머지 시간을 보내겠다는 아이의 다짐을 끝까지 믿고 싶었다.

 둘의 저녁을 해결할 겸, 도착 시간에 맞춰 배달 앱을 이용해 집 앞으로 치킨을 주문해주었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 꽤 시간이 많았을 텐데 아이는 금요일 저녁 숙제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토요일) 저녁, 안부 전화를 걸며 넌지시 과제 완료 여부를 물었다. 바빠서 하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부모님을 뵙고 저녁을 함께 먹느라, 핸드폰을 개통하느라 통신사 대리점을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남편의 말에 타박 대신 위로를 전했다. “고생이 많네.”     


 그리고 일요일 오후, 저 문자를 받았다. 앞으로 자신에게 아이의 숙제를 부탁하지 말라는 말은 통보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앞두고서야 집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챙겨온 가방을 열었을 것이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문제집을 펼치고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숙제를 시작했을 테고 그 모습을 지켜본 아빠는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아이가 겨우 문제집 세 쪽을 다 풀고 아빠가 오답을 체크하고 다시 푸는 과정에서 상황은 험악하게 흘러간다. 좀처럼 설명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보고 결국 아빠는 화를 내고 앞으로 아이 숙제를 봐주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리라.      


 남편의 통보가 담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의 생활 습관과 학습에 나만큼 애쓰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에 이어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육아의 지난한 과정이 외로워서였다.

 남편과 아이에 대한 실망감에 마음 한편에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선언해버리면 그만인 남편과 다르게 나는 아이의 생활과 학습 지도를 좀처럼 놓아버릴 수 없다. 아이의 짜증과 거부에 수없이 상처를 받아도 포기할 수 없는 ‘엄마’로서의 과업이자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서다.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과 ‘잘’ 키우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늘 함께이다. 어렸을 때는 걷기나 말하기, 잠자리 독립, 한글 떼기와 같은 단계에 맞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했고 아이와 함께 끊임없이 애를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유아기를 지나고 아이의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면서 학습과 인성, 생활 습관의 영역에서 아이를 지도하고 이끌어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요즘이다.      


 아이를 키우는 건 참으로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그 과정에 즐거움과 보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에 휘청이고 혼자만 애쓰고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외로워질 때도 있다.

 남편은 좋은 아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며 부모로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부분도 크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가끔은 그도 나처럼 불안해한다. 그런 남편이기에 앞으로 학습을 봐주지 않겠다는 선언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겨우 하루 해놓고!) 포기 선언을 하다니. 스마트폰 통제나 학습과 같은 ‘나쁜 역할’을 엄마인 나에게 오롯이 떠넘기는 것 같아서, 무거운 책임과 불안을 나눠가질 수 없어서 조금은 절망했고 많이 서글펐다. 


 아빠와 이틀을 보내고 아이가 어젯밤 돌아왔다. 잘 다녀왔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엄마가 내준 숙제를 끝냈다는 말부터 꺼내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를 너무 닦달한 건 아니었을까. 조금 더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힘을 내기로 한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아이의 습관과 학습, 둘 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오늘도 비협조적인 아이와 수많은 타협을 하고 불편한 상황을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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