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삶 by 정소현

독후감과 서평 사이

by 김모씨

책을 만난 계기 : '너를 닮은 사람'이라는 드라마를 잠깐 보게 됨. 내 스타일이라고 느낌. 드라마에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됨. 동일한 제목의 단편이 수록된 <실수하는 인간>이라는 책은 이미 모두 대출중. 그리고 출판사는 제목을 <품위 있는 삶>으로 바꿔 개정판 내며 <실수하는 인간>을 절판시켜버림. 나도 호락호락하게 구입하지 않겠다는 오기를 혼자 부리며, 작가의 최근작을 먼저 읽어보기로 함.

인상 깊은 구절:

1. 나는 밥을 혼자 먹는 것이 불편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참해져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나 기분이 나빠졌다. 어떻게 이야기하면 이런 필요 없는 호의를 그만둘지 알 수 없었다. 61쪽

2. "너희 집이 제일 바깥 동 오층이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계속 궁금했어. 그때, 오층이란 거 생각 못했어?" 73쪽

3. 나는 그저 자꾸 찾아와 우는 것이 귀찮아서, 그래, 다 용서한다, 괜찮다, 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해주었을 뿐이다. 울며 들어온 그들은 웃는 얼굴로 돌아가곤 했고, 나는 그들의 예쁜 다리와 건강한 걸음걸이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이 용서받고 행복하게 사는 동안, 나는 병실 커튼 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했던 말처럼 '반병신'이 되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괴로웠다. 78쪽

4. ...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도와드리고 싶었어. 사실 네가 죽으려고 한 게 우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82쪽

5. .. 그 모든 것이 다 자기들 탓이라고 징징거렸다. 그들은 선생님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았는데, 난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도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쉽게 망쳐지도록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그들에게 이야기 해줘봐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85쪽

6. 그의 삶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생각해보았으나 한 사람이 보낸 기나긴 세월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군가 나의 지금을 보고 그간 내가 보낸 세월과 나의 행불행을 상상할 수 없듯 그의 삶 역시 그럴 터였다. 선생님에게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지금은 괜찮은 건지 직접 묻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짐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84쪽

7.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93쪽

8. 생각이 멈추면 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 그러나 심장이 내 의지대로 뛰고 멎는 것이 아니듯, 생각 또한 그랬다. 생각이 심장의 자리에 들어앉아 나를 겨우 존재하게 했다. 아니, 아직은 존재한다고 믿게 했다. 생각은 심장보다 더 강렬하게 나를 삶으로 이끌었다. 99쪽

9. 나는 그 순간 처음 만난 세상에서 완전히 거부당한 기분이 들었고, 부모가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불안한 마음의 원인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죽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내 부모는 내게 늘 사랑스러운 딸, 예쁜 딸이라고 말했지만 몸짓과 눈빛은 두살 터울인 오빠와 네살 터울인 남동생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촉수는 온통 타인을 향해서만 뻗어 나갔다. 목소리와 눈빛의 사소한 변화를 알아챌 정도로 촉수는 예민해졌고, 관계의 끝을 알아채는 새로운 감각이 생겨났다. 102쪽

10.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나는, 생각을 멈추어 완전하게 소멸되기로 했다. 그러나 심장이 의지로 멈춰지지 않는 것처럼 생각 역시 그러했다.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지옥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111쪽

소감 : 결론, 이 책은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나는 하나의 사건에서 나온 두 개의 단편 <어제의 일들>과 <지옥의 형태>를 읽으며 사람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잔인함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학생 소녀들의 관계에서 사소한 질투로 인해 한 소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의 피해자는 살던 아파트에서 추락해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나름의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와 가해를 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친구가 자살하는 원인을 제공한 소녀는 말한다.

"너희 집이 제일 바깥 동 오층이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계속 궁금했어. 그때, 오층이란 거 생각 못했어?" 73쪽

어눌한 말투와 불편한 몸, 언뜻 보기에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저렇게 잔인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소녀(율희)는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자신의 예상과 달리 혹은, 허무로 가득한 자신의 삶과는 다르게 몸이 불편할지언정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불만이었을까? 예전에 가해를 했던 소녀와 친구들은 또다시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과 달리 친구는 추락 후유증으로 인해 예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망각한 뒤였다. 가해자들은 애써서 그 사건을 복기 시키고 ,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 피해자에게 알리려고 하지만 한때 피해자였던 소녀는 그 사건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 다르게.

이어지는 단편 <지옥의 형태>는 가해자 소녀, 율희의 이야기이다.

출생부터 환영받지 못한 그녀의 삶을 보며, '부모 되기'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생존을 위해서 약삭빠르게 때로는 악랄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에 더해 향후 그녀 삶에 펼쳐진 결코 유쾌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잔인할지언정 악마는 아니다. 악마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가해를 입힌 사건, 그녀가 자초한 혹은 그렇지 않은 불행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심장이 멈추더라도 멈춰지지 않는 생각으로 인해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을 체험한다.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나는, 생각을 멈추어 완전하게 소멸되기로 했다. 그러나 심장이 의지로 멈춰지지 않는 것처럼 생각 역시 그러했다. 나는 이것이 내게 주어진 지옥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111쪽

불행한 사건을 겪은 이에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이미 지나간 일은 잊으라고." 심장을 멈추는 것보다 오래 지속되는, 어쩌면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는 것이 '기억'이다. 잊자고 생각하면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가끔은 괴로운 기억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어 일상을 멈칫하게 된다. 숨 쉬고 살아가고, 누군가 관계를 맺는 일은 모두에게 어떤 기억을 남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각인될지도 모르는 기억이 된다는 것은 때론 축복이지만 많은 경우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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