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하는 저녁에 종종 오가는 대화.
남편: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냐. 아침부터 업자 만나고 출장 다니고 점심시간에 운동까지 했더니 죽겠다.
나 : 나도 오늘 아침부터 빨래 돌리고, 모임 다녀와서 바로 병원 갔다 와서 너무 힘들어.
남편 : 나 오늘 몇 보 걸었는지 알아? 2만보 걸었어.
나 : 난 오늘 만 보 걸었다. 차도 없어서 추운데 돌아다니느라 진짜 힘들었어.
남편 : 아우,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냐. 다시 한의원 다녀야 하나.
나 : 아휴~ 이제 (너)먹은 거 어서 치우고 00이 받아쓰기 봐주고 저녁 독서 해야겠다.
남편 : 난 방에 들어가 있을게.
이른바, ‘누가 누가 더 힘든가’ 대결. 승자는 없다. 가끔 아이도 학교 끝나고 수영 갔다 영어 숙제하느라 힘들었다며 이 대결에 참가하기도 한다. 고된 하루를 보낸 배우자에 대한 배려나 격려 따위는 없다. ‘너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다. 넌 돈이라도 벌지.’에서 ‘사회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 가장으로서 존중 좀 해줘.’ 등등. 푸념에 이은 자포자기와 방관이 난무하는 흔한 부부의 저녁 대화다.
첫날 아침이었다. 그날 아침 여덟 시에 나는 집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홀로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설거지 거리로 가득 차 있는 식탁, 정돈되지 않은 침대, 면도하고 난 수염 찌꺼기로 새까매진 세면대. 아빠는 일하러 가고, 엄마는 집안일 하고, 아기를 달래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한다.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부르던 노래의 후렴구에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니....
최소한의 것, 최소한의 것만. 나는 당하고만 있지 않으리라.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그릇 처박아두기, 행주로 식탁 닦기, 담요 객, 아이에게 먹을 것 주기, 아이 씻기기. 비질 절대 안 하기, 걸레로 먼지 닦을 생각도 하지 않기. 이것이 <제 2의 성>이 내게 남긴 전부다.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자, 또 들어보게. 그렇게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으니 응당 기분 좋게 한 잔 곁들여가며 푸짐하게 식사를 즐길 만한 권리는 있지 않겠나? 하지만 그것도 내겐 허락되지 않는다네. 여편네가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거든. 수프를 다 먹기가 무섭게 아내는 발톱을 드러낸다네, 날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말이야. 아마추어 연극을 보러 가자느니, 무도회에 가자느니. 거절은 꿈도 꿀 수 없네. 이 시골 동네에서 ‘남편’이란 동물학대방지협회의 간섭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원하는 대로 짐을 실을 수 있는 고분고분한 가축을 가리키는 말이거든....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하고서 6시면 일어나 열차를 타러 정거장으로 가야 하네. 늦을까 봐 허둥지둥 달려가지. 길은 온통 질척이는 데다, 안개도 짙고, 춥고...... 으으. 그렇게 시내에 도착하면, 다시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네.
<싫든 좋든 비극배우> 체호프
여기 흔한 부부가 또 있다.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이건 더이상 ‘그 남자’, ‘그 여자’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결혼과 출산, 자본주의, 거대한 시스템, 그걸 거스르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힘든 굴레다.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글을 끝낼 수는 없다. 속으로는 ‘내가 너보다 힘들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힘듦을 인정해주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저녁, (나도 힘들지만) 너도 힘들었겠구나. 고생했다. 수고했다. 한 마디 해 보기로 한다. 그도 인간이면 돌아오는 한 마디가 있으리라.
그리고 아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체호프와 아니 에르노를 읽게 해야겠다.
“아들아, 인생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