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우다
오후 5시쯤 저녁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누군가 밑에서 발목을 잡아끄는 듯했다.
오늘은 아이들의 저녁상에 뭘 올려놓을지 고민을 하면서 늘 제자리에 묵묵히 서있는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사다 놓은 콩나물이 눈에 들어왔다. 딸내미가 좋아하는 김치 콩나물국을 끓여야겠다. 당근과 양파, 호박, 계란도 눈에 들어온다. 아들이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재료들을 손질하려는데 거실에서 레고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자기들도 하겠다며 콩콩 달려든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며 건전지를 달아놓은 것 같은 눈의 반짝임이 입으로 나온다.
" 김치 콩나물국이랑 오므라이스으~ "
난 건전지가 다 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야호~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힘빠진 내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그 반짝이는 입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호박은 내가 썰 거야,"
"난 당근 썰래"
"난 콩나물 씻을래, 엄마 그릇 어딨어? 파는? "
나의 동의도 없이 아이들과 같이 저녁 준비를 하게 됐다. 내 몸 하나만 생각하면 나 혼자 하는 게 편하다. 더 빠르다. 쉽다. 아이들과 하면 더디다. 뒷정리가 많아진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말해준다. 저녁 준비를 같이 해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말이다.
원이는 썰고 있는 당근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당근처럼 다루며 한참을 자르다가 말을 했다.
"엄마, 이렇게 당근을 자르고 있으니까, 오므라이스가 요정의 마법처럼 짠하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당근을 키워 준 농부가 있었을 거구, 그 당근을 우리 집 근처 마트까지 배달해 준 사람도 생각나고,
그걸 사다가 요리해 준 엄마도 있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거였어."
아... 머리 속이 말랑해졌다.
당근 써는 아이의 작고 통통한 손과 콩나물을 반쯤 버려가며 씻느라 낑낑대는 아이 모습이 보석처럼 보였다. 당근을 썰며 그 당근이 자기 손에 오기까지의 세상을 생각하는 그 아이의 마음은 내 맘 속에 들어왔다가 눈 밖으로 한 방울 또로록 흘러내렸다.
세상을 생각하는 그 아이의 마음의 소리는, 나의 건전지가 되었다. 그 건전지 힘으로 아이들이 먹을 저녁을 성의껏 만들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게, 아이들의 말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게 새삼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다. 나는 매 순간 얼마나 세상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는지 저절로 돌아보게 된다.
아이가 그림 그리고 엄마는 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