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안 될 텐데 뭐 하러~ 굳이..
"주차하셨어요?"
"네~ ***9요"
"주차 등록해 드렸어요. 어! 근데 2분밖에 안 남으셨네요. 빨리 해드릴게요"
그 말을 들어서였을까? 직원의 손이 분주해 보였다. 포스기 화면을 빠르게 터치하는 것 같았고, 책 바코드 찍는 속도가 평소보다 1.5배속쯤 돼보였다. 분주해진 직원의 손놀림을 보고 내가 건넨 말은,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가 아니었다. 3층부터 지하 2층까지 2분 안에 간다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빌딩에서? 어림도 없었다. 난 100% 확신했다. 당연히 2분 안에 못 갈 거란 확신 때문에 직원들이 빨리 처리를 해준다 한들, 난 뛸 생각이 아예 없었다. 계산하는 데만 2분이 걸릴 수도 있을텐데. 포인트도 적립해야하구. 시큰둥했지만 바빠보이는 직원을 배려해 주는 척하며 말했다.
"어차피 2분 안에 못 가요 천천히 해주셔도 돼요~ "
그 말을 들은 직원 2명은,
직원 A : "그래도 돈이 너무 아깝잖아요. 얼른 해드릴게요"
직원 B: "혹시 모르니까 일단 빨리 해드릴게요"
그 순간 안 될 거란 내 확신은 말끔히 사라졌다. 마음이 움직였다.
한 명이 아닌 두 명이나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의 선의를 믿고 싶어졌다. 어쩌면 정말로... 해볼 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그래. 두 명이나 마음을 모아줬는데 나도 달려보자' 싶었다. 바통 터치하고 뛰는 육상 선수처럼 계산이 끝난 물건을 받아 들고, 인사는 눈으로 대신한 후, 계산대에서 엘리베이터까지 후다닥 뛰었다. 웬일이지?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중이었다. 난 멈출 필요도 없이, 공이 골대에 빨려 들어가듯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타자마자 지하 2층 버튼을 평소보다 2배속으로 눌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건물은 워낙 사람도 많아서 엘리베이터를 안 기다리고 탄 적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시간대도 일요일 오후 4시라 한가할 때는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에 왔다. 한 층도 멈추지 않았다!
'뭐지? 기적인가? 3층에서 지하 2층까지 한 번도 서지 않고 다이렉트로! 한 층도 안 멈췄다고??'
문이 열렸다. 내리자마자 차로 뛰었다. 바로 시동 걸고 엑셀을 밞으면서도 내심 '1분은 넘었을 것 같구. 2분이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혹시 몰라서 카드를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출구에 잠시 대기하니까 차단기가 열렸다. 안 늦은 모양이었다. 정산할 게 없다는 멘트와 함께 차단기가 열렸다. 차단기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와! 대박'이 아니라,
'하아아~ 거 참. 감사합니다! '
감사한데 기막히기도 했으니까.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기다리던 택배를 받을 때보다 좋았다. 그 직원분들은 무료 주차시간이 2분 남았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어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려줬다. 그리고 날 뛰게 했다. 내가 건넨 '어차피'란 단어에 굴복하지 않고 혹시 모르니 빨리 해드리겠다는 말을 전해준 두 사람 마음. 그게 기적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두 분의 교보문고 직원 덕분에 내가 한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어차피! 어차피..
'어차피'라는 말은 결과를 예측하고 그렇게 될 테니까 지금부터 포기하겠다는 거다. 대부분 부정적인 결과를 상상하면서. '어차피 망한 인생, 술이나 먹자. 어차피 늦을 거 천천히 하세요. 어차피 안될 거 뭐 하러 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결과든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애초에 사람의 것이 아닌 세상이 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 아닌 결과를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예상한다. 난 어차피 안될거란 생각으로 직원들의 손놀림을 시큰둥한 눈으로 봤다. 내가 예상한 결과가 맞을거라면서.
어차피란 단어는, 세상 일이 내가 예상한대로 될 거란 오만함이 묻어 있다.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게 만드는 묘한 주문이자, 안 하고 주저앉아도 된다는 무기력한 허락 같다. 꽤나 그럴싸한 근거처럼 내세우게 되는 '어차피'. 옛 선조들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감히 그 조언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차피'라는 말 속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찮아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굳이 긍정보단 부정을 택하겠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다분하다. '난 원래 그랬으니까'라는 헛된 근거로 자신을 그 자리에 주저앉혀 버린다.
'어차피'라는 말은 이렇듯 생각보다 힘이 세다. 나를 새로운 곳에 데려가지 못하게 하고, 나에게 신선한 경험을 주지 못하게 하며, 그리하여 나를 어제와 똑같이 살게 만드는 강력한 주문이다.
교보문고 직원분들은 내가 건넨 '어차피'라는 말에 '뭐, 그렇겠네요'라는 대답을 하고 천천히 처리했을 수도 있다. 나보다 20살은 어려 보이는 분들이었다. 난 그 나이 때 상대의 시간과 돈을 생각할 줄 아는 여유가 없었다. 잠시 부러웠고 존경스럽고 참 고마웠다. 아, 이름이라도 봐둘 걸!
이 서점이 오픈한지 6년이 됐다. 지금까지 6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곳을 오고 갔지만,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운'과 '기적'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그 묘한 순간은 생각보다 늘 가까이에 있었고, 어디서든 이뤄질 수 있는 신의 선물 같다.
'어차피'라는 말 대신 '어쩌면‘ 이라는 마음만 품어도, 우리 일상 속 작은 기적은 늘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