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에서 헌법 적용하기

by 딱하루만

빽이 없다. 학연, 지연, 혈연까지 시가에는 내 편이 없다. 결혼 후까지 빽이 없는 서러움을 겪을 줄이야.


시댁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는 며느리에겐 무기다. 내 방어력이 약하면 남편의 방패라도 필요한데, 나를 지켜줄 방패가 없더라. 남편이 없냐고? 있다. 근데 없다. 남편은 시부모의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한다. 평상시에 내 편이 돼 달라 바라지 않지만, 시가에서 만큼은 남편'background'가 필요하다.

시가의 공격력이 셀수록 남편 방어력은 필수고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예고편 캡쳐사진


남편이 변신로봇이라면 버튼이라도 누르고 싶은 심정으로 옆구리를 쿡 찔러보기도 하지만, 애초에 내 사람으로 변신하는 기능은 없나 보다. 든든한 '빽'이 있다면 시가에서 불편한 이유가 해결이 안 돼도 숨은 쉴 수 있다. 시가의 무례함에서 나를 구원해줄 어벤저스는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조차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바빴다.


'남편 빽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뭐~ ' 라는 마음으로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빼기명상으로 '근육질 마음'을 갖는 것.

두 번째는 법을 방탄복으로 만들어 입겠다는 마음으로 헌법부터 읽었다. 여러 법 중 '기본'이 되며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보편타당함. 5.18 민주화운동의 피로 얻게 된 지금의 헌법.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시가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읽었다.




1. 며느리도 (친정에서 남편처럼) 일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있다.

제12조
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제13조
③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령 > 본문 - 대한민국 헌법
강제노역: 법률에 의한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 강제노역이다 - 출처: 네이버 사회복지학 사전


명절 음식을 같이 나눠서 하고, 서로 필요한 건 없는지 살피며, 엄연히 다른 집의 행사를 돕고 있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인다면, 명절은 더 이상 이혼을 부르는 기폭제가 아니라 기다려지는 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텔레비전 앞에서 술 가져와라 과일 깎아와라 명령하고, 여자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온갖 시중을 들며 명절 음식을 하는 분위기라면 이 헌법을 다시한번 되새기는 편이 좋다.


원이 그림 '이렇게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 엄마!'


시가 분들이 시키기 전에 먼저 술상을 갖다 드려도, 따박따박 음식을 차려놓아도, 며느리를 부려먹을 아이템은 끊임없이 생산됐다. 시가 분들이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묵묵히 전부 해드리면 며느리를 포함해 모두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울 거란 생각은 '인고의 착각'이다.


며느리도 명절 음식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시아버지 생신 때마다 동네 잔치를 안 해도 되는 거였고, 시가 행사에 안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강제로 하라고 말할 권리는 그분들에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대리인간'이 아니라는 걸 헌법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나에게도 남편처럼 손님일 자유가 있다.



2. 말 안 해도 되는 자유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시가에서 내 사생활을 꼬치꼬치 물으신다고 일일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6년째 알고 지내는 동네 엄마가 벤치에 앉아 한숨을 쉰다.


'언니~ 시가 톡방에서 나가고 싶어요 ㅜ'


'매번 어디냐고 묻고 운동하고 있다고 답하면 팔자좋단 소리나 하시면서 말이에요ㅜ'


매번 어디냐 뭐하냐 애들 남편밥은 해먹였냐를 끊임없이 묻는 그 질문에 꼬박꼬박 카톡하고 답문자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며느리에게도 있다.



3. 며느리도 존엄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4조 ③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도 노력한다는데 그 국가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국가가 나서서 명절을 없애줬으면 좋겠다!!) 나와 가까이 있는 국민인 '남편'이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서 노력을 못 하겠다니, 스스로 방어력을 키우려고 헌법을 외우고 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며느리가 시가에 도착하는 시간, 시가에서 자고 갈지 말지는 며느리가 선택할 일이지, 시부모의 명령과 남편의 눈치에 맞춰 알아서 낮은 자세로 있으라는 법은 없다. 며느리의 행동을 시가 부모님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자고 가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며느리에게 있으며, 며느리가 시가에 '늦게'(이 기준조차 시부모의 기준이다) 가거나, 집으로 일찍 간다며 욕해도 되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4. 며느리도 귀한 집 소중한 자식이다.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36조
①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②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시가에서 며느리로서 존엄과 양성의 평등이 유지되도록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보장받은 적은 없다. 다만 11조, 36조 헌법을 만들어준 국가에게 고맙다. 며느리시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확실한 근거라도 댈 수 있으니까.


더 이상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적어도 나와 내 딸 들을 이유는 확실히 없다. 손녀인 원이를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며 손자에게만 더 많은 용돈을 주고, 손녀 이름은 부르지도 않는 그 분들이 법을 어긴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개개인의 처지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어떤 이유로든 며느리의 자유와 권리는 경시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여전히 시가의 갑질은 공공연히 자행된다.(모든 시가가 다 그렇진 않다. 분명 먼저 배려하고 서로 존중하며 진짜 가족으로 지내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도 많이 봤다)


무조건 참고 침묵하는 건 금이 아니라, 가족에 금만 가게 한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적어도 지금보단 한 발짝이라도 나은 세상이길 바란다. 또다시 무례함을 받을 경우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어깨 펴고 말씀드릴까 한다. '아버님~~ 방금 헌법 제37조 1항을 위반하셨네요'


제37조 ①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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