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에서 헌법 적용하기

by 딱하루만

학연, 지연, 혈연까지 시가에는 내 편이 없다. 결혼 후에도 이런 '연'이 없어서 서러움을 겪을 줄 몰랐다.


시댁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며느리에겐 무기처럼 다가올 때가 종종 생긴다. 며느리인 나의 방어력이 약하면 남편의 방패라도 필요한데, 나를 지켜줄 방패가 없었다. 남편은 어느새 시어머니 아들로 변신해 있었다. 평상시에 내 편이 안되도 어쩔 수 없지만, 시가에서 만큼이라도 내 편이길 간절히 바랬다. 시가의 공격력이 셀수록 남편 방어력은 필수니까. 그런 존재가 되어주어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믿는도끼에 발등찍힌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참이었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예고편 캡쳐사진


아들로 변신한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 그 순간이라도 남편으로 돌아봐 내 편이 되어 주길 원하지만 애초에 내 사람으로 변신하는 기능은 없는 모양이다. 그걸 검증도 못 해본채로 결혼을 선택한 나를 자책하는 편이 더 쉬웠다.


든든한 '방패'가 있다면 시가에서 불편한 이유가 해결이 안 돼도 최소한 숨은 쉴 수 있다. 그 숨이라도 쉬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이 많았다. 남편이 나를 위해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기를 바라는 건 나에겐 사치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나의 방패가 되어주지 않았다고 싸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명절은 다가오고, 생신날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시가에 가야될 한달 전부터 몸이 아팠다. 남편도 없고 내편이 아무도 없다면 남은 건 '나'였다.


'남편 빽이 없고 내 편이 없다면 내가 만들자!' 라는 마음으로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빼기명상으로 '근육질 마음'을 갖는 것. 상처받는 나를 돌아보고 왜 그토록 그 말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으며 아파하고 신경쓰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고 왜 서운하며 무엇때문에 그토록 내편이 되어주길 원하는지, 우선 나부터 점검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헌법 몇 가지를 외우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헌법을 외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건, 우연히 서점에서 눈에 들어온 헌법책을 보게 되서다. 온갖 법의 '기본'이 되며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보편타당함. 5.18 민주화운동의 피로 얻게 된 지금의 헌법.


보면서 위로가 됐다. 마음 안에서 울컥했다. '괜찮아. 넌 아무 잘못이 없어. 그저 며느리라는 역할 자체에 대한 그들의 기대치와 바램이 섞여 이 말 저말 떠들었던 거고, 그건 그들의 수준을 보여준 것 뿐이니까'


'왜 명절 전날 오니? 일주일전부터 와 있어야지! 집에서 놀면서 왜 안오는거야'

'아이구 가슴은 쪼그만해가지고 젖은 잘 나오니?'

'뭐 정관수술? 왜 그런걸 내 아들 시키니? 피임할거면 니가 약을 먹든 니가 해야지! 아서라'


내 아들 귀한 걸 알면 남의 집 딸도 귀한 걸 알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바란 건 시대에 맞지 않는 바램일 뿐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 남편을 백년손님이라며 떠받드는데 왜 난 남편의 본가에서 하녀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을까. 이해가 되진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들었던 말들을 헌번에 비추어 보니 '시댁에서 내가 받은 그 태도와 말들은 전부 헌법에 위배되는 것들이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가지라도 외우고 싶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같은게 아닌, 시가에서 나를 지키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뭘 하겠다기보다 그저 듣고 싶지 않은 말에 휘둘리고 흔들릴 때 붙잡을 거라도 챙기겠다는 마음으로.






1. 며느리도 (친정에서 남편처럼) 일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있다.

제12조
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제13조
③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법령 > 본문 - 대한민국 헌법
강제노역: 법률에 의한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 강제노역이다 - 출처: 네이버 사회복지학 사전


명절 음식을 같이 나눠서 하고, 서로 필요한 건 없는지 살피며, 엄연히 다른 집의 행사를 돕고 있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인다면, 명절은 더 이상 이혼을 부르는 기폭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기다려지는 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텔레비전 앞에서 술 가져와라 과일 깎아와라 말만하고, 여자인 며느리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온갖 비위를 맞추며 해달라는 음식을 해서 나르고 시중을 들며 명절 음식을 하는 분위기라면 이 헌법에 위배되는건 아닐지.


원이 그림 '이렇게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 엄마!'


시가 분들이 시키기 전에 먼저 술상을 갖다 드려도, 따박따박 음식을 차려놓아도, 며느리를 부려먹을 아이템은 끊임없이 생산됐다.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묵묵히 전부 해드리면 며느리를 포함해 모두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울 거란 생각은 '인고의 착각'이다.


며느리도 명절 음식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시아버지 생신 때마다 동네 잔치를 안 해도 되는 거였고, 시가 행사에 안 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강제로 하라고 말할 권리는 그분들에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대리인간'이 아니라는 걸 헌법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나에게도 남편처럼 손님일 자유가 있다. 비로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게 있겠지만.



2. 일일히 답변을 안 해도 되는 자유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시가에서 내 사생활을 꼬치꼬치 물으신다고 일일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6년째 알고 지내는 동네 엄마가 벤치에 앉아 한숨을 쉰다.


'언니~ 시가 톡방에서 나가고 싶어요 ㅜ'

'매번 어디냐고 묻고 운동하고 있다고 답하면 팔자좋단 소리나 하시면서 말이에요ㅜ'


매번 어디냐 뭐하냐 애들 남편밥은 해먹였냐를 끊임없이 묻는 그 질문에 꼬박꼬박 카톡하고 답문자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며느리에게도 있다.



3. 며느리도 존엄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4조 ③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도 노력한다는데 그 국가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국가가 나서서 명절을 없애줬으면 좋겠다!!)


며느리가 시가에 도착하는 시간과 시가에서 자고 갈지 말지는 며느리가 선택할 일이지, 시부모의 날카로운 한마디와 남편의 눈치에 맞춰 알아서 낮은 자세로 있으라는 법은 없다. 며느리의 행동을 시부모님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자고 가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며느리에게 있으며, 며느리가 시가에 '늦게'(이 기준조차 시부모의 기준이다) 가거나, 집으로 일찍 간다며 욕먹어도 되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4. 며느리도 귀한 집 소중한 자식이다.

제11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36조
①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②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시가에서 며느리로서 존엄과 양성의 평등이 유지되도록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보장받은 적은 없다. 다만 11조, 36조 헌법을 만들어준 국가에게 고맙다. 며느리시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확실한 근거라도 댈 수 있으니까.


더 이상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적어도 나와 내 딸 들을 이유는 확실히 없다. 손녀인 원이를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며 손자에게만 더 많은 용돈을 주고, 손녀 이름은 부르지도 않는 시아버지는 법을 어긴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개개인의 처지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어떤 이유로든 며느리의 자유와 권리는 경시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여전히 시가의 갑질은 공공연히 자행된다.(모든 시가가 다 그렇진 않다. 분명 먼저 배려하고 서로 존중하며 진짜 가족으로 지내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도 많이 봤다)


무조건 참고 침묵하는 건 금이 아니라, 가족관계에 금만 가게 한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적어도 지금보단 한 걸음이라도 나은 세상이길 바란다. 또다시 무례함을 받을 경우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어깨 펴고 말씀드릴까 한다. '아버님~~ 방금 헌법을 위반하셨네요'


제37조 ①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