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할 게 있어

역시 답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by 딱하루만

14년 동안 한 번도 남편에게 들어보지 못한 말이 있다. 상의할 게 있다는 말. 남편이 이를 닦으며 한 말이다.

‘으 뜨끄 에기훠께~’


이 닦고 얘기한단다. 입안에 치약거품을 잔뜩 물고 이 닦고 얘기한단 말과 동시에 내 머릿속엔 생각들이 비누거품처럼 생기고 사라지고, 만들어지고 터지고가 반복 중이었다.


'상의? 웬일이지? 늘 통보 같은 말만 했던 사람이?? 상의 뭘? 또 자기 집 행사 얘기인가? 한 번도 상의하잔 얘길 안 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상의? 무슨 일이지? 상의라는 말 의미를 알고 얘기하나? 뭘 잘못 먹었나?'


남편이 이 닦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생각이 가지를 뻗어댔다. 이 닦는 그 2분여 동안에, '상의하잔 말'을 처음 들었다는 이유로 생각이 이리도 많아지나 싶었다. 강아지가 물에 젖으면 몸을 세차게 흔들어 털듯, 나도 머리를 흔들고 자꾸만 나오는 생각을 멈추고 빼기했다. 쓸모없는 생각이 있는 상태에선 남편 말이 온전히 들어올 수 없을 테니.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가시나무 중 - 시인관 촌장


남편이 입 안 거품을 헹구고 치실을 꺼내 든다. 나도 빼기 명상하며 머릿속 찌꺼기를 빼낸다. 이를 닦고 나올 즈음, 내 머릿속도 조용해지고 '상의'를 할 준비가 됐다. 남편이 휴대폰을 보여준다. 회사 메일이다. 곧 입을 연다.


‘B팀원 메일인데, 개선점에 이런 내용을 썼어. 한번 봐봐.’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다는 내용이다. A 때문에 팀원 여러 명이 힘들단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업체 사람들과 있을 땐 동료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사람들 힘들긴 하겠다. 당신은 몰랐어?' '왜 힘든 거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이유로 힘들대?'

질문으로 살짝 찢어놓으니, 터진 비닐 사이로 흘러나오는 모래처럼 남편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남편은 소파에 반쯤 기대서 팀원들 성격 얘기를 한다. 그러다 잠시 말을 멈추고, 뜬금없이 준수가 점심시간에 피구 해서 이긴 얘기를 듣고 싶다며 허벅지를 긁는다.


얘기가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팀원 얘기를 시작한다. 팀원끼리 일처리 과정에서 부딪힌 사건을 얘기하며 미간에 주름이 깊게 진다. 내일 상담이 있을 B팀원한테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숨을 얇게 내뱉는다.

한참 얘기하다가 시곗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올 때쯤, 남편은 숨 죽은 배추처럼 말한다.


사실 지금이 KPI 매기는 시즌이라 사람들이 예민하다는 것. 남편도 그 문제 되는 A가 솔직히 싫지만 티를 안 내려고 참았다는 고백 같은 말을 내놓는다. 그 마음이 있으니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아무리 에둘러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단다. 내년에 A를 다른 업무로 내보낼까 싶었다고. 사실 자기도 사람이니 팀원들 전부 품지도 못하면서 그런 척하느라 힘들단다. 오늘 당신이랑 얘기하면서 아차 싶었던 건, A도 힘들 거란 생각은 못했다고.


3시간이 넘게 속에 있는 얘기들을 꺼내놓고 나니, 남은 건 답인가 보다. A도 힘들 거란, 아니 A가 제일 힘들 거란 걸 알았으니 우선 A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스스로 답을 찾아 보여준다. 이젠 자야겠다며 일어난다. 내가 얘기 들어줬으니 상담료 내라는 싱거운 말을 던지고 나도 자러 간다. 듣고, 물어보고 또 들었는데, 답은 남편이 알아서 찾는다. 역시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걸 알아간다.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
- 나이키 광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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