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시간, 고요한 자유로움

by 딱하루만

짐을 쌌다. 평상시와 다른 가벼운 짐. 가족의 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쌓아놓은 짐은 딱 나만을 위한 물건만 있었다. 낯섬보단 홀가분함이 컸다. 캐리어 지퍼를 닫는 순간에 홀가분함 외에는 별 감흥 없었다. 가족들에게 1박 2일 동안 내 시간을 갖겠다고 선언하며, 호텔을 예약했을 때도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설렘도. 기대도.


예약한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오는 내내 뭔가 다름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소리였다.


가족이 여행 갈 땐 체크인을 하고 올라가는 내내 두 아이들이 캐리어를 놀잇감 삼아 타고 끌고 밀고 오는 소리가 그득했지만, 오늘은 내 신발 소리만 들렸다.


카드키를 서로 자기가 꽂겠다고 아웅다웅하는 소리. 침대자리 정하는 티격태격하는 소리. 그 익숙했던 소리가 없었다. 호텔 방문을 열고 카드키를 꽂고, 문을 닫고 고요한 순간에 잠시 '당황'했다. 그 당황함에 살짝 몸을 기대어 있었다. 그 고요함을 깨고 누군가 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은 불안함에 문을 잠갔다. '딸깍'

내 숨소리만 들렸다. 그 낯선 적막함을 그리워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결혼생활 14년 동안, 어떤 소리가 주변에 항상 있었다. 내가 원치 않고, 내가 선택한 소리가 아닌 소리들에 둘러싸였다.


아기의 울음소리, 시아버지의 밥 달라고 고함치는 소리, 음치 남편의 노랫소리, 칼질하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수많은 순간들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가 아무도 나에게 소리 내지 않고, 나도 소리를 내야 할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왔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부직포로 된 실내화로 갈아신으며, '아~ 이제 내일 점심 12시까지는 아무도 나를 방해할 사람이 없구나'를 되새김질했다.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장 보러 갈 일도, 음식 할 일도 없고,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 여기 오기 전에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 순간이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는 걸 1초마다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가 김영하 작가님은 어딜 가든 꼭, 뭐든 경험해보려고 애썼던 걸까? 헤밍웨이가 '두 심장을 지닌 큰 강'에서 보여줬던 송어의 생생함은, 본인이 직접 닉이 되어 낚시를 했기 때문일까?



전화기를 끄고, 캐리어를 열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책 5권과 노트북을 꺼냈다. 책에 둘러싸여 하루 종일 책만 보고 싶은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책이 눈에 들어오고 뭐라도 쓸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외쳤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말. 그 말이 90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21시간 동안 허락된 나만의 방. 시간도 공간도 제한적이지만, 음.. 꽤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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