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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하루만 Apr 13. 2020

화상회의의 맛

양념이 제 역할을 잘할 때 만 원하는 맛이 납니다.   

재택근무 한 달째, 화상회의가 익숙할 만도 한데 난 여전히 별로다. 1시간 반이 넘는 행아웃 회의가 끝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5시 30분. 좀 있으면 저녁을 준비하러 주방 갈 시간이다.


힘이 없다. 만나서 하는 회의보다 화상회의가 더 기운 빠진다. 목소리가 끊기거나 이중으로 들리거나 목소리가 울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더 집중하게 된다. 끊긴 목소리를 잇고, 울리는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느라 진짜 중요한 안건에 에너지를 모으기가 어렵다.


그래도 애들 밥은 줘야 하니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킨다. 혼자 살고 있었으면 컵라면 하나로 때웠을 것 같은 기분이다.




냉장고를 힘겹게 열다. 찬 기운이 흘러나온다. 발은 뒤로 움찔 물러선다. 눈은 미나리를 발견했다. 미나리 사과 초무침을 하기 위해 양념에 쓸 것들을 하나둘 꺼낸다. 고춧가루 간장 매실액 설탕 식초! 죽 일렬로 세워놓고 서로의 비율을 조절하며 두툼한 유리그릇에 넣었다.




다섯 가지 양념을 숟가락으로 저었다. 설탕 입자가 어느 정도 녹은 듯해서 맛을 본다. 음.. 단맛이 반 숟갈 정도 더 필요했다. 다시 넣고 저었다. 이젠 괜찮다.


딱 좋은 양념 맛을 본 순간, 나한테 붙어있던 생각 하나가 양념장에 툭 떨어지는 듯했다.


고춧가루는 매운맛을, 설탕은 단맛을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에 새콤 달콤 칼칼한 미나리 초무침의 맛이 나는 걸 보니 '그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방금 회의했던 '그 사람'에 대한 내 생각이 계속 떠나질 않았었다. 집중이 안될 만큼.

'도대체 저리 의미 없는 말을 왜 가장 중요한 말처럼 계속 늘어놓는 거지?'

요런 잔가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맛을 내고 있었을 뿐이구나.
아~ 그랬구나!
그렇다면 굳이 저 사람이 어떻고 저떻고를 따질 필요가 없네
저 사람은 계속 저런 맛을 낼 테니까. 어디에 있든.




설탕이 식초를 대신할 수 없고 고춧가루는 설탕한테 인상 쓰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를 평가하지 말고 그저 내 맛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주어진 자리에서 '내 맛'을 내면 그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하며 들었던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미나리 초무침 양념이랑 섞여 녹아 사라졌다. 깔끔하게!


양념병도 사회적거리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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