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 여사제
[서파 가는 길]
호텔에서 준비하면서 진짜 백두산 천지를 보러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긴장했던 것 같다. 7월 14일 날씨는 천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멀미를 심하게 했다. 멀미약을 먹고, 가이드가 준 패치까지 붙이고, 운전자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멀미로 일행과 떨어져 앞자리에 앉았는데, 백두산 가는 길을 전면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백두산 가는 길 양쪽으로 자작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이 나무들이 겨울이 되면, 흰 등줄기를 보일 것이다. 길고 긴 도로를 달려야만 백두산 서파에 오를 수 있는 입구에 도착한다. 환경보호를 위해 중국 정부에서 개인 차량은 허락하지 않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중소형 버스로만 서파 계단 앞까지 갈 수 있다. 도로는 가는 길과 오는 길 두 개뿐이었지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드디어 서파로 갈 수 있는 입구에 도착했는데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한국 단체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 안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일행과 떨어지지 않은 채 되도록 빨리 버스를 탈 수 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서파 입구까지 올라가면 된다. 버스는 자주 운행했기에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는 않지만, 만약 조금만 시간을 지체하거나 일행을 놓치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이곳 생리를 제일 잘 아는 가이드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다.
호텔에서 버스로 서파 가는 버스 탑승구에 도착,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또 다른 입구에서 도착, 한 번 더 버스를 갈아타고 천지에 오를 수 있는 서파 입구에 도착한다. 도착하자 살짝 날씨가 흐려져서 마음이 급해졌다. 가이드와 하산 시간을 정하고, 우리 일행은 천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1442개의 계단, 우리 아파트 90층 높이를 오를 수 있을까 걱정하며, 까마득해 보이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지금 다시 사진을 보고 있는데 처음 400개의 계단을 올랐을 때의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르는 방법을 모르니 그냥 마구잡이로 올라갔다. 목구멍에서부터 타는 느낌이 들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숨도 안 쉬어지고, 목과 가슴이 아파지자 이젠 오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나?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 때 같이 간 지인이 숨을 입으로 쉬지 말고 코로만 쉬고, 엉덩이로 다리를 올리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엉덩이로 다리를 올리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코로 숨을 쉬는 건 뭔지 알 거 같아 따라 해 봤다. 숨이 많이 진정되고, 목과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방법이 있구나, 올라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800개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에 1000이 보였다. 갈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힘이 생겼다. 오르자, 오르자. 모든 잡념은 잊어버리고, 오르자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오르자. 올라가서 쉬자.
눈앞에 갑자기 1440에서 1442가 보였다.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던 것이 갑자기 눈에 보이면 안 믿어지는 게 이런 거구나. 너무 힘들어 땅만 보고 붉은 숫자만 보고 왔는데 막상 다 오르고 보니 믿어지지 않았다. 붉은 1442 숫자는 당신은 천지를 볼 수 있는 곳에 올라왔으며, 이제 천지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허락처럼 보였다.
깜짝 놀랐다. 천지를 본 순간 이것이 정말 백두산의 천지인가? 비현실적이었다. 천지에 도착했을 때의 서늘한 공기, 코끝을 스치는 묵직한 습기,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천지까지. 모든 감각이 새로워졌다. 푸릇푸릇한 언덕과 화강암을 병풍처럼 두르고 천지는 고요히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천지에 오른 사람들의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찍고, 동료를 찾고, 먹고, 기도하고. 그런 사람들의 소리를 천지는 조용히 품고 있었다. 잔잔했고, 신비로웠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고히 혼자서 이렇게 모든 계절과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는 점에서 경외감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천지에 오는 길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갈아타고, 갈아타고, 계단을 오르고. 그렇다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사람 모두에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하는 말처럼 천지를 보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천지의 고고함과 경이로움은 타로카드 2번 여사제가 보여주는 고결함과 연결된다. 여사제는 세속과는 거리를 둔 채 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녀 앞에서 선과 악, 좋은 그른 것이 모두 무력화되듯이, 천지 앞에서는 국경, 국가, 인종, 선과 악의 모든 구분이 사라지며, 인간의 나약함과 취약함만이 드러날 뿐이다. 푸른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여사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비밀스러움과 이지적이고 냉정한 모습을 강조한다. 천지 역시 그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인간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은 채,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간의 바람 따위에 조응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의 섭리에 맞춰 자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화산이 되어 분출하고, 때로는 고요한 호수가 되어 침묵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새겨왔다. 우리가 본 천지의 모습은 그 긴 시간의 한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호들갑스럽게 그 시간을 기억하려고 한다.
이때였다. 천둥소리가 먼저 들렸고, 이내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려고 했다. 이내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변하는 백두산 날씨를 직접 목격했다. 준비해 간 우비를 갈아입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천지를 계속 바라보았다. 곧 안개 장막이 우리 앞을 가리고, 천지가 사라질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는 자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자연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우리는 천지에 경외감을 표현했다.
각자 어떤 마음으로 이 잔을 백두산 천지에 바쳤는지 모르겠다. 다만 힘들게 올라온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모두 흥분했고, 감탄하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리고 쉽게 다시 올 수 없는 곳인데, 이렇게 잠깐 보고 내려가야 하니 아쉬웠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배고픔도 잊고 있었다. 패키지여행의 묘미는 바로 시간을 잘 지켜야 다른 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올라온 그 길을 그대로 다시 내려가야 했고, 비도 왔지만, 마음은 한층 가벼웠다. 이후 일정은 모든 좋았다. 내일 북파에서 또 볼 수 있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천지 앞에서 나는 정치적 상황이나 우리나라 분단의 아픔 등을 꺼내지 못했다. 그냥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여사제의 신비로움이나 자연의 경이로움은 우리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나를 정화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1442개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서 조금씩 자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1442개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면서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함을 전했다. 나를 백두산 여행에 기꺼이 초대해 준 친구에게, 낯선 나를 여행 크루로 받아준 일행에게, 그리고 혼자 여행을 갈 수 있게 기꺼이 도와준 가족에게, 그리고 건강한 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온전히 자신을 지키며 그곳에 있는 천지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고했고, 동해 물과 함께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길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