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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아닌, '삶'을 비추는 영화 <세계의 주인>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by 채채

* 스포가 있으니, 영화 관람 후에 보시는 걸 권장합니다.

*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관람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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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포스터와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아무런 스포 없이 영화관 가서 그냥 보라는, 너무 좋은 영화였다는 후기들만 듣고

바로 예매해서 영화를 보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나에게도 올해의 가장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인 '우리들', '우리집'에서 그랬듯이

이 작품도 주인공의 삶을 다큐로 촬영하듯이 바로 옆에서 함께 하는 것처럼 영화가 흘러간다.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우리의 일상 속 한 장면으로 다루어서 더욱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사건의 자극성이 아니라, 사건 그 이후의 삶과 일상 회복에 초점을 두어 더 좋았다.

어떤 사건을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그리는 윤가은 감독의 접근이 인상깊었다.


아무런 내용도 알지 못한 채 영화를 보니 영화의 초반이 흘러갈 때까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낸 점이

오히려 메시지를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짚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수호의 서명 운동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이야기.

나 역시도 어떤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이라는 말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말들이 피해자들에게 더 낙인을 찍거나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 속 주인이가 겪는 불편함은 노골적인 2차 가해가 아니라 이런 ‘사소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더라도 그것이 도리어 피해자를 지울 수도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영화를 보며 주인이의 친구들이 사건을 알게 된 후 주인이를 두고 하는 말들을 듣고 그들에게 미운 감정이 들었지만, 그럼 나는 그런 생각들에서 떳떳하다고 볼 수 있을까?

나였다면 주인이의 친구들처럼 동정이나 의심, 불편함, 우월감, 비교의식, 안도 ... 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과연 안느꼈을까 싶다.

영화를 통해 이런 지점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할 뿐이다.


덧붙여 피해자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서로 연대한다.

그들은 또 다른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대신 자원봉사로 선을 쌓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그리고 주인이가 지금처럼만 늘 밝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모두 역시...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항상 괜찮아야 하는 것이 아니며,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힘들어할 권리도 있다는 것.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해도 된다는 것. 이걸 꼭 알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면서 가해자의 잘못으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가해자에 대한 서사, 가해 행위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남겨진 이들에게는 여전히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곁에 있는 사람까지도 일상에서 크고 작은 힘듦을 겪는다. 가해자가 사라졌음에도 말이다.

영화와 다를 바 없이.. 현재에도 끊이지 않는 성범죄, 그리고 미약한 처벌이 이 현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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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에 쪽지를 읽는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게 비단 성범죄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용기있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도 용기를 주고

그것은 곧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서로의 존재가 익명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단단하고 따뜻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것은 삶을 계속해서 용기 있게 살아갈 힘이 될테고.


세계의 주인이들이, 맘껏 행복하고 슬퍼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

이 영화는 두고두고 다시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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