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이곳 저곳의 수많은 길들에 대해서
걷기는 찬양의 대상이다. 둘레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전국을 떠도는 사람도 있고 스페인까지 찾아가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걷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걷기 여행은 장비를 적게 가지고 다니는 게 미덕인 것 같다. 짐을 짊어지고 천천히 걷는다. 매 걸음 순간순간마다 길을 느끼고 걸으면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내면과 만난다.
그렇다고 하더라. 순전히 들은 얘기다. 순수하게 이동만을 목적으로 걷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다.
비슷한 급으로 달리기도 있다. 근육이 조여오고, 숨이 가빠지면서 리얼한 자기 자신을 느끼고 세계를 느낀다. 이것 역시 어디서 듣거나 읽은 얘기다. 조금이라도 이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전문을 통과할 때도 동선을 신중히 계산한 후에 움직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전거도 걷기나 달리기의 연장선으로 쳐주는 분위기다. 비록 자전거는 바퀴와 톱니바퀴, 체인으로 이루어진 기계가 확실하지만 사람의 힘을 동력원으로 쓴다는 점에서 한 수 접어줄 수 있는 것 같다. 귀에 꽂은 피어싱을 세 개 정도까지는 이해해 주는 어른들과 비슷하다. 지하철에서 귀를 세 곳 정도 뚫은 여고생을 보더라도 '그래, 저 정도는 개성이라 할 수 있지. 어험. 나도 예전에는 메탈리카 좀 들었지'라며 쿨한 척하는 식이다. 쿨한 척하는 어른도 귀걸이가 네 개로 늘면 태도가 좀 달라진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네 개는 너무 많잖아? 학생이 말야, 공부 안해?' 이런 식으로 나오기 일쑤다. 한 개가 늘어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는 건 괜찮은데,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면 탈선이 된다. 이런 경계선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좀 관대한 분들은 오토바이까지 같은 편으로 인정해주기도 한다. 오토바이든 자전거든 걷기든 햇볕과 바람에 온 몸을 내놓는 건 마찬가지니까. 단, 헬멧은 머리를 완전히 덮는 게 아니라 얼굴은 노출된 걸 쓰고 눈에는 선글라스나 고글을 착용해야 한다. 이런 걸 다 갖췄더라도 포장된 도로를 달려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푸른 보리밭과 노란 해바라기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 붉으죽죽한 황토길 사이로 먼지를 일으키며 가로지르는, 그런 분위기의 오토바이여야 한다. 청바지는 필수고 짙은 갈색의 가죽 자켓은 옵션이다. 조건이 좀 까다롭지만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걷기와 오토바이를 동급으로 놓으려 하는 시도 자체가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계란을 먹는 사람까지 채식으로 인정해주는 것과 비슷한 원리여서 통하기는 한다. 같은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런 슬로건은 의외로 잘 통한다.
이런 슬로건에도 한계는 있다. 우리는 하나라고 아무리 외쳐도 자동차는 아예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얘기를 꺼낼 수 조차도 없다. 채식주의자 판정협의단을 만나서 계란을 먹는 것까지도 채식으로 인정하자고 간신히 설득을 마치고 돌아서다가 '소도 풀을 먹으니까, 풀 먹는 소고기를 먹는 건 채식 아닌가요?' 라고 묻는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채식주의자들도 가끔 고기가 먹고 싶을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 맥락에서, 여행을 얘기할 때 렌터카를 빌려서 다니는 자동차 여행의 낭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낭만을 느끼거나 예찬하기에 자동차는 너무 일상적이다. 가끔 시골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때 맛있다고 찬사를 보내면 할머니들이 한 마디 하신다. 일침이다.
“거, 뭐 맨날 먹는 밥 뭐 대단하다고 호들갑이야.”
자동차 여행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느낌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 맨날 타는 자동차 그까짓게 뭐 대단하다고. 그러나 여행이든 일상적인 삶이건간에 외부와의 접촉은 처음에는 감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그와 관련된 기분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 일요일 저녁마다 개그콘서트를 본다고 치자. 처음에는 하하 호호하면서 본다. 그러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마지막 코너가 끝나면 그 유명한 개그 콘서트의 엔딩곡이 나온다. 빰빰빠. 스티브 원더의 신나는 멜로디다.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하고, 그러려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자야만 하는 사람에게 이 멜로디가 신나게 들릴 리가 없다. 스티브 원더를 욕할 수밖에. 스티비 원더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다.
‘문제는 월요일이 아니라 당신의 직업’이라는 경구처럼, 스티브 원더에게는 잘못이 없다. 차도 마찬가지다. 차가 문제가 아니라 그 차를 탈 때의 내 기분이 문제다. 차라고 하면 출퇴근, 출장이 먼저 기억 나는 사람에게 차는 회피의 대상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 상태로 차를 타면 좋은 점이 나쁜 점보다 훨씬 많다.
괌에서는 200에서 300달러 정도면 어지간한 렌트카를 4일쯤 빌릴 수 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말만 잘하면, 네비게이션도 끼워 준다. 한국말로 하면 되니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게 또 의외로 어렵다. '사장님 너무 예쁘세요' 정도로는 어림없다. 내가 해봐서 안다. 사장님도 하루 이틀 장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허튼 짓 하지 말고 하루에 3달러 정도만 추가로 내자. 3달러면 네비게이션에 은박 돗자리, 조그만 아이스백까지 받을 수 있다. 정말 요긴한 물품들이다.
차 열쇠를 받고 나면,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모순된 상황은 묘한 해방감을 준다. 낯선 길을 가 본다. 걷기나 달리기면 온 몸으로 길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차를 타고 있으면 나의 정확한 위치는 길 위가 아니다. 나는 차 속에, 네 개의 바퀴 위에, 충격을 막아 주는 용수철 위에, 의자 위에, 차 지붕 밑에 있다. 에어컨은 쾌적한 온도를 유지한다. 햇빛은 선팅된 유리를 통해 한 번 걸러진다. 길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얻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길에서의 추억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다.
언덕을 향해 곧게 뻗은 길, 혹은 크게 굽어진 길을 자동차로 가면 눈 앞에 길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갈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가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보리, 홉, 물만으로 충분히 좋은 맥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바다와 하늘, 자동차만 있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역으로 이 세 가지 중에 무엇하나라도 빠져선 곤란하다.
차 속의 사람에게 괌의 소나기는 황홀한 경험이다. 우기에 괌을 방문하면 하루에 세 번 정도는 소나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소나기는 풍경에 생기를 준다. 정지된 풍경, 사물도 비를 맞으면 살아나는 것 같다. 차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소나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차분해 온다. 어딘가 안도감도 든다. 명상이나 사색, 나와의 대화 그런 류의 것들과 이런 분위기에서의 운전은 서로 통한다. 명상처럼 온전한 집중이 이루어진다. 앞 차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통의 흐름과 신호를 파악해서 그에 반응한다. 조금만 달려도 헉헉거리고 무릎이 쑤시는 말 안 듣는 몸뚱아리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차와의 상호작용이 훨씬 리드미컬하다.
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 역시 몸으로 비를 맞을 때보다 훨씬 과장되게 들린다. 차는 조용히 달리고, 빗소리는 투둑투둑 이어진다. 유리창에는 물방울이 맺혀 가로등이 번져 보인다. 이럴 때 라디오를 켜면 김광석이나 산울림의 노래가 흘러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문득 라디오를 틀어보면 그럴리가 없다는 듯이 레게나 힙합이 바가지로 물을 붓듯이 쏟아진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여긴 괌이니까.
바닷에서 수영을 마치고 좁은 차 안에서 비비적거리면서 수영복을 갈아 입노라면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다. 한참 수영을 하고 약간 지쳐서 차로 돌아온다. 트렁크에는 1개런짜리 플라스틱 병에 물이 가득 들어있다. 트렁크속에서 미지근하다 못해 약간 따뜻해진 물을 온몸에 들이부어 바닷물을 헹궈낸다. 큰 비치타올로 몸을 닦고 수건을 두른 채 운전석에 앉는다. 엉덩이는 축축하고 차 안은 뜨겁다. 에어컨을 최대 풍량으로 튼다. 기분좋게 몸이 마른다. 뒷자리의 아이스팩에서 레드불을 꺼내 한 모금 마신다. 아직 시원하다. 단 것이 피를 타고 돌면 온 몸에 새로 기운이 솟아난다. 이런 순간들을 낭만이라 부르고 싶다.
차를 타고 여행한다고 해서 낭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낭만이 있다. 타인이 강요하는 낭만을 바라보다 나의 낭만이 무엇인지 잊어 버릴 때, 바로 그때 불행이 시작된다. 타인이 만든 기준으로 타인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사는 삶에 ‘내’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없는데 행복이고 뭐고 있을 리가 있나. 누가 뭐라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행복. 괌에서 기어코 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