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레다드 요새에서 바라 본 바다
이곳은 요새다. 성벽과 대포도 아직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대포는 여전히 늠름하다. 여기저기 낀 녹은 관록이다. 요새의 이름은 '포트 누에스트라 세노라 데 라 솔레다드(Fort Nuestra Senora de la Soledad)'.
북한산성, 남한산성처럼 간결한 이름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명 센스. 이런 것이 우리와는 거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스페인 사람이다. 작명 센스는 달라도 이곳에 요새를 세워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이제 갓 입대한 한국의 훈련병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배를 댈 수 있는 항구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바다도 잘 보인다. 조그만 돛이라도 달려만 있으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게으른 병사라도 이곳에서는 눈만 뜨고 있다면 충분히 적들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옛날 머나 먼 스페인에서 이곳까지 군함을 끌고 온 사람들은 해안가에 멋대로 배를 대고 모래밭에 올랐다. 그들은 총과 칼을 앞세워 요새를 건설하고는 대포를 늘어 놓았다. 그것만으로 땅의 주인이 바뀌었다. 새로 주인이 된 자는 땅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이 포트 누에스트라 세노라 데 라 솔레다드, 우리말로 하면 '고독의 성모 요새'다. 그래서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이곳의 원래 지명은 없어지고 고독의 성모 요새라는 이름과 바다를 향한 녹슨 대포만 남았다.
솔레다드(고독). 생각해보면 건방진 일이다. 침략자라면 침략자답게 공격적으로 전진이라던가 번개, 필승같은 이름을 붙이는 게 분수에 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독은 침략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고독은 약한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이곳에 올라와 잠시만 바다와 마을을 보다보면 왜 요새 이름에 고독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칼과 대포를 앞세워 이곳에 들어와 강짜를 부린 스페인 군인은 이 언덕에 올라서는 순간 아마도 맥이 탁 풀렸을 것이다. 그래서 칼이고 총이고 다 내려 놓은채 망루에 털썩 주저 앉아 담배라도 한 대 피워물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고독'말고는 다른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군은 조직이지만 군인은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고독한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밑에는 넓지 않은 묘지가 있고, 무덤에는 묘목처럼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무덤들은 바다를 곁으로 내려다봤다. 마을의 한가운데는 오래 된 느티나무만한 교회가 있었다. 마을의 한 구석에는 알록달록한 정글짐과 미끄럼틀이 갖춰진 놀이터가 있었다.
먼 곳에서 떠나온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겠지. 아이는 교회가 떠나가라 울고, 희고 깨끗한 옷을 입은 어머니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겠지. 어머니의 젖은 차오르고 아버지는 벙글벙글 웃으면서 술 한 잔 생각을 하고 있을테지. 세례를 받은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면서 자라겠지. 해가 지고 배가 고프면 아이는 집으로 힘껏 뛰어가 어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식사를 양껏 먹고 잠들겠지. 바닷가에서 수영도 배우고 또래와 해변에서 뛰놀며 자란 아이는 어느 달 밝은 밤, 이 언덕에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백하겠지. 소년과 소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에도 부끄러워하면서 첫 키스를 오래오래 하겠지. 달이 없는 어두운 밤과 이제 갓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소녀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탄력과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의 뜨거운 입김 같은 것들에 익숙해질 무렵이 되면 마을 사람들의 축복과 함께 교회에서 결혼하겠지. 건강한 남자와 여자는 바닷가 모래 사장에서 밤이 새도록 불을 밝히고 바베큐를 구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결혼을 자축하겠지. 만취한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고 노래를 고래고래 부를 때 달빛은 훤하고 파도는 철썩이겠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남자와 여자도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아이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례를 받은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겠지. 그리고 그 아이도 때가 되면 이 언덕에서 얼굴을 붉히며 첫 키스를 하겠지.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언덕 밑의 묘지에 묻혀서 자신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고 그 아이들도 그럴 것이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교회와 놀이터와 바다와 무덤을 분주히 오가겠지.'
홀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을과 바다와 무덤을 내려다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괜시리 뜸북뜸북 뜸북새, 아니면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하고 시작하는 노래를 자신도 모르게 부른다. 물론, 스페인 사람이니까 스페인 노래를 불렀겠지만.
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독하다. 칼과 대포를 앞세워 들어 온 점령군이라 해서 외로움을 모를 리가 없다. 괌을 점령한 스페인 군인이건 만주를 떠돌건 조선의 독립군이건 강제로 고향과 부모를 떠나야 했던 모든 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고독했을 것이고, 어린 시절에 배운 노래를 조용히 불렀을 것이다.떠나야만 했던 이들이 그리워한 모든 것은 '성모'다. 그래서 이 곳의 이름은 고독의 성모 요새다.
이상은 순전히 나의 추측이다. 요새의 입구에는 검은 물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게 무슨 개풀 뜯는 소리냐는 듯이 의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