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감 감생]8. 열대에서 살면 평생이 청춘일까

이파오 해변 공원의 새벽

by 탱커레이 텐

여행의 마지막 날은 쓸쓸하다. 집에 가기 싫다는 건 좋은 여행이었다는 증거다. 마지막 날은 여행의 기분이 거의 나지 않는다. 쌓인 눈을 치우듯 그저 당면한 일을 하는 기분이다. 잡다한 기념품을 가방 속에 테트리스처럼 꽂아 넣으면서 짐을 잘 싸야 하고 렌트카에 기름을 적당히 채워서 반납해야 한다.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표를 받고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은 항상 애매하다. 오전 비행기는 언제나 너무 이르고 오후 비행기는 어정쩡하다. 체크 아웃을 하고 나면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도 없다. 조금이라도 멀리 가자니 렌트카 반납과 비행기 시간이 신경 쓰인다. 돌아오는 길에 뜬금없는 교통 정체라도 생기면 어쩔 것인가. 공항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공항에 가기까지 남은 시간만 신경 쓰인다. 기껏 한다는 일이 호텔 풀에서 수영을 하고 잠깐 바다에 가서 수평선과 파도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신이 날 리 없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일을 순서에 맞춰서 빈틈없이 해야 하는 일은 원래 그렇다.

이런 날일수록 굉장히 일찍 눈이 떠진다. 괌에서 일찍 일어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떠지는 눈은 어쩔 수 없다. 감기는 눈과 떠지는 눈, 모두 내 소관이 아니다. 잠과 관련된 건 인간의 의지로 극복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 눈이 일찍 떠진 마지막 날 아침에 산책 삼아 이파오(Ypao) 비치에 간 적이 있다. 산책이라 하기엔 먼 거리였지만 마지막 날이라 사소한 것이라도 기념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 날은 1월 1일이었다. 새해의 첫 아침. 늘 맞이하는 아침이지만 뭔가 달랐다. 굳이 옷을 차려 입고 차에 시동을 걸어 이파오 비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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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오 비치는 시간에 따라서 성과 속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곳이다. 낮의 이파오는 철저하게 세속적인 공간이다. 시내에서 운전을 하다가도 5분이면 바다로 들어갈 수 있다. 사무실에서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일하다가 "오늘 점심은 이파오에서 바베큐라도 해 먹을까?"하고 부장님이 말하면 11시 30분에 막내가 사무실을 나서서 근처의 K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1회용 컵, 접시, 맥주를 식탁 위에 잘 깔아 놓기만 하면 12시부터는 전 직원이 바베큐에 맥주를 곁들여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원한다면 돌아가면서 건배사도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이파오에 들어서서 백사장에 이르기까지는 넓직한 잔디밭과 주차장이다. 어지간한 야구장 정도 넓이는 된다. 잔디밭 곳곳에는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과 석쇠가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 해변의 모래는 약간 거무틔틔하고 거칠다. 바다도 맑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그 편이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기에는 더 자연스럽다.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서는 떠들고 고기를 굽기가 아무래도 불편하다. 시끌벅적하게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낮의 이파오 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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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이파오 바다는 이런 데서 떠들어도 될까 싶은 장소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온도는 높지 않았다. 눈이 내린 날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차를 세우고 잔디밭을 걸었다. 잔디에는 눈 대신 이슬이 맺혀 있었다. 군데군데 하얀 꽃이 떨어져 있었다. 백사장에서는 지난 밤 12시 정각에 불꽃을 쏘아 댔던 발사대를 철거하는 작업이 한참이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틀림없이 해낸다. 손발이 척척 맞는 솜씨를 보고 있으니 성과 속이 하나로 이어지고, 날씨가 다르고 풍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 세상은 온통 하나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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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일생을 사계절에 비유한 충고를 들을 때마다 열대 지방에도 그런 충고가 있을지 궁금했다. 인간의 일생이 사계절을 닮았다면 일년 내내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살면 평생을 비슷한 온도로 살게 되는 것일까. 괌은 아침 8시도 덥고 저녁 8시도 덥다. 1월도 덥고 6월도 덥다. 아침과 점심, 저녁의 구분이 거의 없고, 일 년도 큰 구분이 없다.

괌에서 태어나면 사춘기 무렵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해서는 죽을 때까지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맥주를 바닷가에서 마시면서 비슷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사람의 삶은 되도록이면 굴곡이 없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런 세계관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태어나 맵고 뜨거운 음식에 독한 술을 퍼마시다 결국에는 정신을 놓은 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서울 토박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표가 나는 것과 같다. 뼛속까지 배어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나는 뭐든지 시작을 했으면 분명하게 끝을 맺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 세계에서 나는 일정 기간을 주기로 시작과 끝을 반복했다. 입학, 졸업, 입학, 졸업, 입대, 제대, 출근, 퇴근, 입사, 승진, 퇴사. 이런 걸 반복하고 있다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이 이어지듯이, 나는 점점 겨울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헐떡 거리면서도 곧 다가 올 겨울의 추위가 두려웠다. 인생이란 끝까지 가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터프가이들의 세상에서 살아온 내게는 피니시 라인이 없는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물 속에서 숨을 참아보면 알 수 있다. 1분만 참겠다고 알람을 맞추고 들어가는 것과 참을 만큼 참아보겠다고 스톱워치를 켜고 기록을 재면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만약 회사 생활도 40살까지는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이러저러한 일을 하면서 10년을 보낸 후, 50살 이후부터 5년간은 인저리 타임을 보내듯 다니면 된다고 가이드가 있었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에서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피니쉬 라인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시간에 따라 다른 단계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 걸 억지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 살면서 얻은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대로 담담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차를 돌려 호텔로 가서 밥을 먹고 가방을 싸야 한다. 기름을 채우고 차를 반납하고 티켓팅을 하는 긴 줄에 서야 한다. 운이 좋으면 줄이 짧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줄이 짧다고 해서 비행기가 빨리 뜨는 것도 아니다. 면세점을 돌고, 초콜릿이나 술병을 만지작거리다가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여행은 끝난다.

한국에 도착하면 출발의 역순이다. 버스를 타고, 가방을 푸는 기계적인 일을 마치면 으레 라면이 생각난다.물이 끓고 스프 봉지를 탈탈 흔들면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는 세계가 다시 '철커덕'하면서 시작된다. 물론,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좋은 점은 얼마든지 있다.

평생을 끝이 없는 청춘으로 사는 것보다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맹렬하게 살도록 나는 길러졌다. 길러진 대로 살아야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다양한 라면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터프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에 사는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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