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감 감생]9.오랫동안 기억할게

이나라한 마을 주변의 묘지

by 탱커레이 텐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한다.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잎이 돋는다. 생명 전체를 놓고 보면 생사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관점이 아니다. 조물주의 관점이다. 신은 사람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신은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서 사람이라는 특정 종만을, 한 개인만을 특별히 대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의 공평이다. 반면 사람은 나 자신을 비롯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세계의 전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된 것들의 집합체가 사람이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나와 연결된 세계의 일부가 없어진다는 의미다. 평소에 자주 보던 사이가 아니었어도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그만큼 없어진다는 의미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추억들은 이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된다. 그리고 내가 없어진다면 그 시간과 공간은 모두 없어져 버린다. 세상 하나가 없어져 버린다.


추억의 양 그러니까, 함께 했던 시간이 적다해서 그에 비례해 슬픔이 작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린 아이의 죽음은 더 큰 슬픔이다. 긴 인생을 살았건 짧은 인생을 살았건 모든 슬픔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죽음에 공평한 무덤을 만든다. 그리고 마치 그 사람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가끔씩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듣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대답도 없지만 한참을 앉아 있으면 어쩐지 위로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래서 무덤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괌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누군가는 죽고, 그를 위한 무덤도 당연히 있다. 한국과 다른 것은 무덤의 위치다. 괌의 무덤은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타고, 고속도로를 나와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야만 고인의 자리에 닿을 수 있는 우리의 감각과는 많이 다르다. 괌에서는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 혹은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묘지들이 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큰 용기를 내어 남부의 해변에 있는 묘지에 들렀다. 추모의 공간에 관광객이 들르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해 매번 묘지를 지나칠 때마다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자리에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 같았다.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울 수 있는 공간은 흔하지 않다. 그 공간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아무도 그 공간을 침범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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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을 끝내고 묘지에 들어갈 용기를 낸 것은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라는 시 때문이었다. 폴 발레리가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폴은 딱 세 명이다. 80년대 TV방영 만화인 <이상한 나라의 폴>에 나오는 폴, 2000년대를 주름잡은 격투 게임인 철권에 나오는 격투가 폴 피닉스, 그리고 마지막이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폴 발레리다. 이 세명의 폴들을 모두 언급한 건 폴 발레리에 대해 내가 아는 수준이 겨우 이 정도라는 의미다. <해변의 묘지>에 대한 이해 수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 부분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경우는 있다. 명작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것. 내게 폴 발레리라는 이름과 <해변의 묘지>라는 시는 마지막 구절의 첫 행으로 남아 있다.


바람이 인다!...... 살아 보도록 해야겠다!


지중해에 있는 어느 해변가를 내려다보는 묘지에서 내뱉은 시인의 이 말을 평론가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뭐가 맞는 해석인지는 이제와서 딱히 관심은 없다. 하지만 ‘살아 보도록 해야겠다!’는 이 강한 말투 때문에 나는 기어코 결례를 무릅쓰고 묘지로 들어섰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있는 해변의 묘지였다. 바람도 몹시 불었다.


묘는 살아있는 사람의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무덤은 한국처럼 흙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 혹은 대리석을 이용한 구조물 형식이었다. 묘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무덤 중 똑같은 무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살아 있던 시절을 기념하듯 묘지마다 다른 장식이 있었다. 크기와 색깔,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아무 장식도 없이 잔디밭에 십자가만 꽂혀 있는 무덤도 있었고 지붕까지 갖춘 무덤도 있었다. 망자의 생전이 각각 다르듯 묘지 역시 달랐다. 그 중 레이스가 달린 무덤이 눈에 띄었다. 연보라색으로 칠해진 무덤의 가장 자리는 레이스 장식이었다. 무덤 위에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갈색 머리의 천사 인형이 무덤을 지켜주고 있었다. 유독 화려한 무덤들이 묘지 곳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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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덤은 모두 아이들의 무덤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세상이 무너졌을 때, 특별히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야만 했던 그들의 마음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묘지에 머무를 수 없었다. 서들러 묘지를 빠져 나왔다. 묘지 밖의 도로에는 여전히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멀리서 달려오는 파도가 해변에 부서지고 있었다.


죽음은 나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병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장례식장뿐이다. 장례식장은 낮에는 한가하다가 밤이면 술잔과 함께 바빠지고 삼일째의 첫 새벽이 밝자마자 장지를 향해 떠난다. 이른 점심을 먹고 장지에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르면 죽음은 잊혀진다. 죽음을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뉴스다. 그러나 뉴스 속의 죽음은 모두 타인의 죽음이다. 당장은 놀랍지만 단 한 번으로 소모된다. 검은 나비 모양의 아이콘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댓글이 전부다. 이제 죽음을 기억하라는 충고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죽음을 모른 척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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