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페 호텔 풀장에서 들은 김광석
밤이었다. 나는 산타페 호텔 풀장 가의 선베드에 앉아 아내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산타페 리조트는 작지만, 그래서 밤은 낭만적이었다. 풀장 주변의 야자수에 달린 조명에는 흐릿한 주황색 불이 켜졌다. 촛불이라도 밝힌 것처럼 알맞게 어두워서 동굴 속처럼 아늑했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낮고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피아노를 칠 때 오른손의 화려한 연주를 살리기 위해 왼손으로 도솔미솔하는 화음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듯이 규칙적이고 단조로웠지만 박자에 충실했다. 풀 주변의 야외 바에서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팝송이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틀어주는 팝송은 늘 그런 식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다. 바닥이 하늘색으로 칠해진 풀장의 벽면과 바닥에 설치된 조명에는 하얀 불이 들어왔다. 숨을 참고도 끝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만 풀장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하늘색 보석처럼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썬 베드에서는 가족처럼 보이는 현지인들이 야자수 잎사귀를 엮어 공연용 의상을 만들며 한가롭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한국인 렌터카 업체 사장에게서 받은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햄과 체리를 안주로 맥주를 홀짝거렸다. 짭짤한 슬라이스 햄에는 후추가 뿌려져 있어서 맥주와 잘 어울렸다. 짭짤하고 기름진 햄을 손가락으로 한 입 집어 먹고는 그걸 우물거리는 채로 시원하고 쌉쌀한 맥주를 한 모금, 그리고 상큼하고 달달한 체리를 한 알 먹었다. 짜고, 쓰고, 달고 새콤한 맛이 입 안에서 계속해서 이어져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좀 작은 사이즈의 맥주를 한 병 비우고 내가 뱉은 체리 씨가 한 주먹쯤 되었을 무렵 아내를 돌아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짙은 분홍색과 하늘색이 섞인 긴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술병을 든 채로, 썬 베드에 나른하게 기대서.
“이 색은 마젠타고 이 건 사이언이야.”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를 서류봉투 크기로 접어 가방에 넣으면서 아내는 내게 말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분홍색과 파란색이란 말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원색의 선명함이 마젠타와 사이언이라는 말에는 있었다. 내 아내에게 여행의 의미 중 하나는 정성들여 원피스를 고르고 잘 접어서 가방에 넣은 다음 여행지의 바닷가나 풀장에 가서 그것들을 꺼내 입는 것이었다. 옷장에 걸린 모든 원피스를 입어 본 후에 그 중 잘 어울리는 것들을 고르고 원피스에 어울리도록 손톱 발톱을 칠하느라 아내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곤 했다. 먼저 잠자리에 들었던 내가 새벽에 눈을 뜰 때마다 거실에는 매니큐어와 아세톤 냄새가 가득 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나도 조금 피곤했지만 잠들기는 아까웠다. 나는 맥주를 한 병 더 마시려다 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가 가만가만히 팔다리를 휘저었다. 물은 깊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명치 정도까지 차오른 물은 처음에 들어갈 때만 차가웠을 뿐 물 속으로 들어가자 아늑하게 따뜻했다. 온 몸을 담그자 익숙한 한국어 노래가 들려왔다.
-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분명히 김광석이 불렀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였다. 나는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수영을 하다가 1절이 끝날 때쯤에는 수영을 그만두고 풀 가장자리에 팔을 걸치고 몸을 기댄 자세로 아내를 바라봤다. 마젠타와 사이언의 원피스가 주황색 불빛에 비춰서 원색의 강렬함은 사그라졌지만 대신 따뜻하고 포근하게 보였다.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올라갔다.
-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노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라는 가사가 아련하게 반복될 때는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마저 들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내가 세상에서 없어지면, 누가 아내 옆에 남을지 생각하자 하늘색 타일이 깔린 수영장 바닥이 아득하게 보였다.
우리는 동갑내기 부부였다. 아이는 없었다.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는 것은 서른 다섯까지였다. 서른 여섯 즈음이 되자 혹시 못 갖는 것이 아니냐고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명절마다 고향을 찾는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어서 애를 낳아라. 지금까지 둘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어.”
나는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요.”
“그건 니가 아이를 낳아 보지 않아서 그런 거야.”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따박따박 대답했다.
“그건 엄마가 아이를 낳아 봐서 그런 거겠죠.”
아이를 놓으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내와 내가 그나마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건 맞벌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유마저도 표면적인 것이었다. 그 밑에는 대출이 깔려 있었고, 매달 내는 이자가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살 뿐이었다. 맞벌이를 포기하고 외벌이를 하는 순간 그런 것들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아이는 감정적으로는 행복이겠지만 금전적으로는 지출처였다. 과연 지금의 생활을 포기할 만큼 아이가 절실하고 소중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보통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내 어머니 역시 자식과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싫어했다. 어머니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아들로서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들이 좋아하는 것은 ‘예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대답과 싱긋하고 보여주는 믿음직한 미소였다. 그걸 벗어나 질문과 대답이 계속 이어지게 되면 감정싸움이 되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나는 충분히 행복했고, 더 이상의 행복을 바라기보다는 이 상태로 인생을 멈추고 싶었다. 미래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미래는 가수 윤미래가 전부였다.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나서는 더 이상 수영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대통령들이 서거했을 때 개그 콘서트와 무한도전이 결방되고 대신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던 것처럼, 나 역시 물장구를 치고 숨을 헐떡거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조용히 물에서 나와 잠자고 있는 아내 옆에 앉아 맥주를 한 병 더 열었다. 어설프게 생긴 아이스박스였지만 맥주는 충분히 시원했다. 한 병을 다 마실 때 즈음 아이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김광석은 단 한 곡의 노래로 해낸 것이다. 노래의 힘은 위대하다. 베트남 전쟁을 멈추게도 했고, 누군가의 머릿속을 온종일 휘저어서 수능을 망치게도 한다. 서른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가수가 부른 노래는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 날 해가 화창하게 떠오르자 어제의 감성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신나는 레게가 괌 답게 흘러나왔다. 쿵짝쿵짝. 바다가 날 불렀다. 철썩. 햇볕이 눈부셨다. 쨍. 아이와 미래와 걱정, 그런 것들이 한 번에 날아갔다. 그래서 아직도 아이는 안 가졌다. 엄마,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