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티디안 해변에서 보내는 한낮
리티디안 해변은 가기 힘들다. 차를 빌리면서 리티디안 가는 길을 사장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사장님은 그 외지고 먼 곳을 굳이 가야겠느냐면서 차를 타고 가기 좋은 해변과 관광지 대여섯 곳 정도를 한번에 추천해 준다. 좋은 정보에 감사드리면서 그곳들도 꼭 가보겠다고 답하면, 사장님은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인다. 사장님은 이어서 요즘은 차 유리를 깨고 현지인들이 귀중품을 털어가기도 한다면서 최신 정보로 겁을 준다. 도둑들은 아무래도 밤늦게 활동할테니, 도둑들이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 오전 일찍 다녀오겠다고 대답하면 사장님은 알게 모르게 한숨을 한 번 더 쉰다. 그리고는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가는 길이 험해서 타이어 펑크도 잘 나고, 바로 어제도 한 대 견인했다고 푸념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씀을 한참 하신다. 귀 기울여 듣다가 그런 경우에 보험으로 처리 가능한지 똘망똘망하게 물어보면, 물론 보험으로 처리되니 안심하라고 하시는데, 누굴 안심시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보험으로 처리된다니 다행이다.
사장님 말씀대로 리티디안은 외진 곳에 있다. 가는 길은 험하고, 도둑이 가끔 나타나는 위험한 곳임도 틀림없다. 현지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말씀은 항상 옳다.
리티디안은 괌의 북쪽 꼭대기에 있는 해변이다. 북동쪽의 투몬 베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30분 정도는 운전해야 한다. 외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멀다는 것과 가기 힘들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가는 길은 꽤나 즐겁다. 일단 괌에서는 운전 자체가 어렵지 않다. 괌의 운전자들은 굉장한 베테랑이거나 혹은 면허를 갓 딴 초보 둘 중의 하나처럼 운전한다. 뭔가 대충대충 설렁설렁하면서 지킬 건 지킨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좌회전을 해서 안되는 곳에서도 대충 눈치를 보다가 핸들을 꺾기도 하는 반면 신호는 굉장히 잘 지킨다. 과속하는 사람도 드물다. 애초에 과속을 할 일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선글라스를 끼고 차 안에서 이글스의 ‘Take it easy’나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 영화의 주제곡 같은 걸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기분으로 30분쯤 운전하는 것은 꽤나 즐겁다. 30분은 좋은 노래 대여섯곡 정도 따라 부르기에 약간 부족한 시간이기도 하다.
중간에는 사장님 말씀대로 지독한 비포장 도로가 있다. 하루에 한 두대쯤 견인차에 끌려갈 법하다. 여기는 8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남극탐험이란 비디오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헤쳐나가면 된다. 남극탐험은 간단한 게임이다. 주인공은 앞으로 달려가는 펭귄이다. 전진하는 길의 곳곳에는 구덩이가 있다. 빠지면 죽는다. 보기엔 구덩이인데 실제로는 크레바스쯤 되나보다. 이걸 좌우로 잘 피하면서 전진하는 것이 이 게임의 묘미다. 절대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이게 간단한데 제법 재미있다. 리티디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비포장 도로도 마찬가지다. 전화번호 키패드로 따지면 1,5,9 정도의 위치에 구덩이가 있을때 어떻게 돌파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할 것인가를 운전자는 순간적으로 계산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다보면 은근히 재밌다. 가끔 대담하게 역주행도 하면서 연속된 구덩이를 세련되게 피해 가다 보면 남극탐험 속의 펭귄이 된 기분이다. 펭귄이 중요한게 아니라 게임 주인공이란 게 중요하다. 주인공이 될 기회는 흔하지 않다.
이렇게 한참을 가다 보면 도로도 평평해지고 왼쪽에 갑자기 바다가 나타난다. 그야말로 '팟'하는 기분으로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차를 세울려는 찰나, 차를 세우지 말라는 경고문이 보인다. 그러니까 도로에 갑자기 이유없이 차를 세워서는 안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홀리듯이 차를 세우는 지점이 여기인 것이다. '괌 공무원들 제법 열심히 일하는데?포인트를 잡을 줄 알아' 하고 감탄하면서 바다로 계속 간다.
도착이다. 하지만 바다로 왔는데, 바다는 없다. 춘래불사춘 같은 말장난이 아니다. 정말 없다. 바다를 향해 왔는데, 차를 세우면 나무만 가득하다. 처음 온 사람들은 여기가 해변이 맞나하는 불안감이 들 지경이다. 리티디안이라는 표지판도 없다. 다행히 주변의 사람들은 무심한 듯이 쿨한 태도로 느릿느릿하게 차에서 짐을 내린다. 여기서는 '맞아? 나도 몰라?'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게 키 포인트다. 일단 남들처럼 느릿느릿,무심하게 짐을 내리고 숲 속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간다. 무심한 태도, 이것이야말로 괌에서의 멋이다.
오솔길은 울창하지만 30초도 채 이어지지 않는다. 오솔길은 이내 끝나고 숲을 나서는 순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암전으로 분위기를 잡았다가 확하고 불을 켜면 관객들은 열광하고 드럼과 기타가 두두두두하면서 시작하는 락스타의 공연같다.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무대의 강렬한 조명, 그보다 더 강렬한 태양, 강렬한 카리스마가 쏟아진다. 리티디안 해변이다.
백사장의 모래는 곱고 파라솔 따위는 없다. '헤이 보이, 내 음악에 쉼표는 없어'하고 질주하는 락 스타처럼 모래와 바다, 햇볕만 가득하다. 스트레이트의 세계다. 있어야 할 것만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그늘을 찾아 걸어가다보면 살아 있다는 것도 스트레이트하게 느껴진다. 목 뒤가 따끔거린다. 애써 손바닥만한 그늘을 찾아 의자를 펼친다. 아이스박스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낸다. 아직 충분히 차갑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냉장고에서 갓 꺼내서 손이 시려울 정도의 맥주는 너무 인공적이다. 계곡물에 담가 둔 것처럼 약간 차가운 온도. 뜨거운 햇볓 속에서 애써 찾아낸 그늘에서 마시기엔 이 정도가 좋다.
맥주는 언제나 치익하고 열리고, 꿀떡꿀떡 넘기면 쌉싸름하면서 달고 시원하다. 육포를 한 조각 먹는다. 바싹 말라있지만 양념이 듬뿍 배어 있어서 입에 넣으면 침이 금새 괸다. 짭쪼롬해서 다시 맥주를 한 입 마시게 된다. 이걸 서너번 반복하면 어느새 맥주는 없다. 적당한 양이다. 이제 바다로 뛰어들 시간이다.
바다는 파도가 치지만 조용하다. 움직임과 소리가 반복되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바다 위에는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닌다. 파도치는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위태롭다. 나비는 나비의 가벼움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물보라가 튀기는 바다 위를 편안하게 날아다닌다. 어쩌면 바다 위에서 나풀거리는 나비는 시간이 멈춘 것을 상징하는 증표인지도 모른다.
괌의 마트에서 산 싸구려 스노클 장비를 끼고 물에 잠긴다. 땅을 떠나 다른 세상에서 떠다니면 내 몸뚱아리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내가 여기 있구나. 햇볕에 목 뒤가 따끔거리고 조금 전에 먹은 육포와 맥주 냄새가 가득한 트림을 가끔씩 하는 내가 있다.
바다에서 놀다가 지치면 도시락을 들고 그늘을 찾아 오솔길로 들어간다. 아침에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면서 만든 샌드위치다. 식빵에 치즈 두어 종류, 햄과 베이컨이 내용물의 전부다. 일종의 비빔밥같은 개념이다. 원래 비빔밥도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대충 비빈 것이 맛있듯 샌드위치도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든 게 훨씬 맛있다. 한 입 가득 베어물면 입안 가득 치즈맛과 기름맛이 퍼진다. 빵에는 견과류가 들어있다. 전체적으로 고소하고 짭짤하다. 맥주를 한 입 마시면, 변함없이 쌉싸름하고 달고 시원하다. 맥주와 샌드위치 뿐이지만 이런 저런 맛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온몸이 입과 혀로 이루어진 짐승처럼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다른 일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빵과 치즈와 햄, 베이컨 그리고 맥주만이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다. 뭔가를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할 말도 없다. 인생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자의 입장에서 보면 먹고 자고 싸는 일들만 하는 존재이다. 이런 일들은 몸으로만 할 수 있고 보통은 한 번에 하나만 할 수 있다. 아주 예외적으로 싸는 일만큼은 뭘 싸건 다른 일을 하는 와중에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권장되지는 않는다. 화장실에서 오래 책을 보면 할머니에게 혼나고, 잠자리에서 딴 생각하고 있으면 파트너는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인생을 산다는 건 감각으로, 몸으로, 한 번에 하나씩,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정확하게 저렇게 말한 건 아니고, 대충 저런 의미였다. 이런 류의 명언은 워낙 많아서 조금만 찾아봐도 더 멋진 말을 찾을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이다. Carpe diem 이라고 라틴어까지 인용해가면서 멋지게 외친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라틴어야 말로 이런 명언계의 끝판왕’이라는 느낌에 새삼 감탄했다. 우리 나라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한시나 고사를 인용하면서 ‘어험’하면, 듣는 사람들이 ‘예예’하면서 무조건 받아 적는 것처럼 나도 무작정 따라 하고 말았다. 까르페 디엠. 발음마저 입에 짝짝 붙었다.
옛어른들의 말씀은 동서를 막론하고 지키기가 어렵다. 어쩌면 제자들이 후대에게 숙제를 남겨 주는 기분으로 어려운 것들만 잔뜩 써서 책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도 졸업할 무렵이 되면 후배들은 좀 더 때리고 엄격하게 지도하는 게 좋겠다고 진지하게 건의하는 게 세상 이치다. 나도 제대할 무렵에는 말년도 예외없이 유격, 혹한기 훈련에 참가해야한다고 진지하게 건의하는 쪽지를 중대장에게 보냈다.
위대하신 성인들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내 앞을 살다가신 수많은 선배들도 못한 일을 내가 어찌 달성했겠는가. 여러모로 지금 이 순간을 살기란 몹시 힘든 일이고 보통은 머리로 어제를 후회하거나 내일을 걱정하기만 했다.
그동안 머리로 살아가다보니 어쩐지 인생이 리얼하지 못했다. 뭔가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엑셀이나 피피티를 보기도 하고 만들기도 했다. 그걸 가지고 영차영차하면서 빔 프로젝트를 연결해 회의도 했다. 넥타이를 매고 참석한 아저씨들은 이걸 알고 떠드는 건지 그냥 떠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과연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싶은 의문이 문득문득 들었다. 빔 프로젝터 스크린에 떠오르는 주문같은 숫자보다 다른 것들이 머리를 채웠다. 예를 들면, 어제부터 이유없이 네 번째 발가락이 아픈데, 이걸 구두를 벗고 한 번 시원하게 주무를까 하는 고민. 물론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머리로 하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일이 된다. 딱히 서로 나눌 얘기도 없고, 서로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이 만나서 하기에 가장 좋은 일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건 어쨌거나 제한된 시간이 있으니까. 일단 밥그릇이 비면 적당히 덕담을 나누다 일어서면 되고, 술은 술병이 비니까. 그리고 술은 어색한 순간에 건배를 권할 수 있는 결정적 장점이 있었다. 이러다보니 밥 먹고 술마시는 일이 직업이 됐다. 프로 런처(luncher), 프로 드링커(drinker)다.
언제나 프로의 세계는 냉엄하다. 프로 런처는 아무리 맛있어도 음식에 집중하지 않는다. 즉, '아 그거 안 드세요? 그럼 저 좀 주실래요?' 이런 말을 절대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뭔가를 우물우물 씹고 있다가도 상대방이 질문을 하면 꿀떡하고 삼키고 얼른 대답을 해 줘야 한다. 보아뱀만 코끼리를 삼킬 수 있는게 아니다. 프로 런처도 뭐든 삼킬 수 있다.
프로 드링커는 더 어렵다. 우선 프로 드링커는 절대 취하지 않는다. 카스와 하이트,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차이가 없을 것 같은 부분에서도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잔이 없어도 자로 잰듯 소맥을 말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히 건배를 제의한다. 아무리 취해도 잽싸게 계산해 영수증을 챙기고 다음 날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속에서 불이 나고 목구멍으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라도 입가에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터프한 세계다.
시간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렇게 보낸 시간들은 아무래도 가벼울 것 같다.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입장 여부는 이런 시스템으로 구분되지 않을까. 쭉정이를 골라 내듯이. 평생을 알맹이 없이 가볍게 살아왔으면 지옥으로, 충실히 살아와서 묵직하게 가라 앉으면 천국으로 가는 식이다. 이승에서도 고통받고 죽어서도 고통받아야 하니 너무 가혹한 것 같지만, 영화 빠삐용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 유죄. 천국과 지옥의 입장 여부를 이런 기준으로 판단할 경우를 대비해 렌터카 사장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괌에 가면 항상 리티디안에 가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면죄부인 셈이다. 약간의 비용이 들지만 그만큼 확실하다. 리티디안에서는 시간의 밀도를 속성으로 꽉꽉 채울 수 있다. 그래서 딱 두 시간만 있다가 간다. 리티디안에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가는 건 좀 미안한 일이니까. 난 그저 저승의 심사관이 갸우뚱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충실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는 정도. 아, 이거 쉽게 판단하지 못하겠는데 하고 심사관이 갸우뚱하는 그 순간이면 충분하다. 그 이후는 프로 드링커의 단련된 솜씨로 술 한 잔 하면서 천천히 협상해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