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갓나 비치 근처의 더 코브에서 맞는 저녁
책 좀 읽었다는 분은 앞 장에서 일출이 나왔으니 다음 차례는 일몰이겠구나 하면서 책장을 넘겼을 수도 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번엔 일몰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그 다음 장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른 태양과 한낮의 찌는 더위에 대한 이야기.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일몰지지파와 일출지지파로 나눌 수도 있다. 해는 뜨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니까. 나는 단연코 일몰파다. 우선 일몰은 대중적이다. 동해안까지 가거나 새벽 바람을 맞고 산 정상에 올라야 느낌이 제대로 나는 일출과는 다르다. 일몰은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운만 좋으면 볼 수 있다. 퇴근길에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조수석을 젖혀 거의 누운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데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로또라도 사고 싶은 기분이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 걸릴 때가 있다는 것. 인생에 이 정도 덤은 있어야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진다.
일몰의 또 다른 장점은 오랫동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국물요리랄까, 푹 우려내는 느낌이다. 국물 요리는 재료가 아니라 불과 물과 시간이 맛을 내준다. 자갈을 넣고 끓여도 뜨끈하게 끓이면 국물은 먹을 만하다. 반면에 해가 뜨는 순간, 그 찰나만 볼 수 있는 일출은 그런 맥락에서 샤브샤브와 가깝다. 잘 만든 육수에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를 집어넣고 솜씨 좋게 휘저은 후 잽싸게 건져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일몰에는 기술이나 재료 따위 필요없다. 어디서건 볼 수 있다. 게다가 꽤 오랫동안 볼 수 있다. 주황색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해 아예 깜깜해질 때까지. 바닷가의 노천 바에 앉아 있다면 맥주 3병 정도는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시간이다.
'더 코브(The cove. 풀네임은 메스클라 온 더 코브 Meskla on the cove) 레스토랑'은 일몰파들에게는 성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성지답게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원래 성지는 약간 험한 곳에 있어야 좀 더 신비감이 생기는 법이다. 같은 성분의 약수라도 아파트 단지 뒤뜰에서 나오는 것보다 어디 산골짜기에 있는 게 좀 더 시원하고 효험이 있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코브를 가는 날 만큼은 일정표에 '코브에서 일몰보기'를 써 놓고 이걸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정도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일정표에 맞춰서 하는 일이 모두 그렇듯 코브 방문도 시간을 딱 맞추기 보다는 여유있게 가는 게 좋다. 아직 해가 남았을 때, 그러니까 한국 여름 기준으로 오후 5시 정도의 느낌이다. 슬슬 하루가 저물어 가고 목 언저리도 살짝 끈적해져서 찝찝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다.
이 시간의 느낌은 괌이라고 다를 것 없다. 아침에 나와 하루 종일 돌아 다녔으니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트림을 할 때마다 온 종일 돌아다니며 두 캔쯤 마신 레드불 냄새가 냄새가 느껴지면 일몰을 볼 때가 된 것이다. 이 때 뭔가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려 하면 '이 시간에 이 촌구석까지 왜 가야 하는 거야'하는 불평도 일행 중에 나올 수 있다. 그것도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일출을 보러 새벽에 일어나 여차저차하는 수고에 비하면 이건 거저나 다름 없다. 불평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주차하고 내린다. 말을 잠재우는 건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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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는 알루팡 비치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야구장으로 치면 VIP 박스석 같은 곳이다. 쾌적하긴 하지만 현장감은 없다. 이정표로 삼기 좋을 뿐이다. 주차는 코브에 하더라도 코브에 지체할 때는 아니다. 곧장 알루팡 비치로 나간다. 운이 좋은 사람은 썰물 때의 해변을 걸을 수 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 정도의 확률은 아니다. 일출과 일몰처럼 물때도 밀물 아니면 썰물 둘 중 하나다. 반반 확률로 썰물이니 안심해도 좋다. 모래톱이 길게 이어진다. 물을 먹은 모래는 단단하다. 아직은 어둡지 않다. 썰물때라면 물은 캣치볼을 해도 좋을 만큼 멀리까지 빠져 있다. 중간중간 모래톱이 솟아 올라서 신발에 물 묻히지 않고도 제법 멀리 나갈 수 있다. 알루팡 비치는 수영보다는 산책에 좋은 곳이다. 느긋하게 '아 경치 좋구나'하고 있는 사이에 해가 지기 시작한다.
이 타이밍에는 '일몰 따위 개나 줘 버려'라는 식으로 불만에 가득차 있다가도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웃통을 벗고 조깅 팬츠를 입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와 함께 석양 속을 씩씩하게 뛰어간다.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있노라면 불만따위 개나 줘버렸는지 행복감이 가득해진다. 노을을 보다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런 생각도 한 번쯤 해보게 된다. 일출은 목표를 다지는데 유용하고 석양은 지난 날을 돌아보는데 알맞다.
일상 생활속에서 이런 질문은 항상 잊혀져 있다. 그것이 일상의 힘이다. 사실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당장 점심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가 더 절박한 문제다. 그러나 이런 석양 속에서 저녁에 뭘 먹을지 얘기하는 건 어딘가 경박해 보인다. 절대자와 단 둘이 밥이라도 먹고 있다 치자. 아무리 싱겁더라도 그 상황에서 '저기 죄송하지만 소금 좀 집어 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인다.
답도 나오지 않는 물음을 생각하다보면 문득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온다. 날이 저물면서 더웠던 날씨도 조금 선선해진다. 정신을 차려보면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하다. 코브로 가서 맥주를 시키면 함께 갔던 사람들은 모두 골수 일몰파가 되어서 아까 찍은 사진들을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래서 코브는 일몰파의 성지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보다는 이런 쪽이 훨씬 소중하다. 쓸모없는 수다, 차가운 맥주같은 것들.
2020년 기준으로 코브는 없어졌다. 코브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술집이 들어섰다. 그것 역시 얼마나 오래 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해변과 일몰은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