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몬 베이가 보이는 호텔방에서 맞는 아침
일출은 좀 부담스럽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나 레슬링 선수를 보는 기분이다. 내가 딱히 도와 준 것도 없고 평소에 관심도 없었는데 괜히 나까지 뿌듯해진다. 그러면서 나도 좀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각오 비슷한 생각도 하게 된다. 시상식은 금방 끝나고, 시상식이 끝나면 그런 기분도 금방 사라져서 지금껏 수많은 시상식을 봤지만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일출을 보고 있으면 딱 그런 기분이 든다. 해가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 뭔가 울컥하면서 장엄하고,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기분이 든다. 지구의 성공적인 자전에 내가 도움 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그래서 일출은 가급적 보려 하지 않는다.
'햇님, 당신의 노력과 성공에 찬사를 보내지만 저는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 '하면서 돌아서는 쿨한 마음가짐, 바로 그런 것이다.
농담이다. 사실은 누가 일출을 보러 가자고 권하면 싫다는 말에 곁들이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준비한 농담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답변을 준비할 정도로 일출을 싫어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일출을 보려면 해가 뜨기 훨씬 전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새해를 일출과 함께 맞이하자고 하는 사람은 최악이다. 겨울 새벽은 춥다. 영하의 날씨에 강풍이 불어 온다. 겨울 새벽길을 걷다 보면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자란다. 자의로 걸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원망의 대상은 분명했고 저주는 뾰족했다.
새로 산 패딩의 성능을 실험할 생각이 아니라면 매일 뜨는 해를 굳이 보겠다고 새벽 공기를 맡느니 이불 속에 누워 있는 편이 건강에 훨씬 좋다. 평소의 생활습관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일찍 일어나서 차가운 온도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의사도 있을 리 없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20km쯤 떨어진 회사에 교통 정체를 피해 8시 반까지 출근하려면 5시 반 정도에는 일어나야 했다. 언젠가 아랫집에서 새벽부터 너무 쿵쿵거린다고 우편함에 편지를 집어넣기도 했다. 실내에서 실내화를 신으실 것을 정중하게 권유하는 애절한 내용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비뚤어진 심성 탓에 '저라고 좋아서 그 시간에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답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랫집 사모님께서 임신 중이라는 말을 듣고 실내화를 하나 사기는 했다.
겨울에는 그나마 출근길이 깜깜해서 부지런하다는 자부심이라도 가져볼 수 있다. 반면 여름에는 같은 시간이라도 온 세상이 환하다. 게다가 조금만 걸어도 덥다. 부지런하다는 자부심은 개뿔, 버스에 탈 때 이미 지친다. 떠오르는 해를 향해 운전하는 버스 운전사도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이 정도는 그나마 건실한 생활인으로서 참아 볼 수 있다. 보다 나쁜 상황도 있다. 전날 과음해서 택시를 타고 갈 때다. 속은 울렁거리고, 회사는 딱 맞춰 들어가거나 아슬아슬하게 늦는 시간의 경계선 상에 있다. 택시 미터는 거침없이 올라가지만 차는 막힌다. 이런 날 환하게 빛나는 해가 장엄하게 떠오르는 걸 보고 있자면, 나는 도대체 왜 사는가 하는 질문만 떠오른다. 이런 날을 일주일에 두 번쯤 맞이하다보면 일출은 몸과 마음에 해롭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고난이 반복되면 신념은 강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일출을 싫어하건 말건 해는 끊임없이 뜬다. 그런게 자연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누가 싫어하건 좋아하건 상관없이 묵묵하게, 그때 해야 할 일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 그런 고로 괌에서도 해는 뜬다.
괌의 아침은 굉장히 빨리 밝아 온다. 우리 나라의 일출은 '자 이제 간다. 정말 갈거다. 다들 준비됐지? 빠뜨린 거 없지?' 이렇게 한참 수선을 떨다가 '하나아, 두우울, 셋'하고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 같은 걸 배경음으로 틀고 떠오르는 것 같다. 떠오른 후에도 '봤지? 내가 그 장엄하신 햇님이시다'하고 과시하는 것처럼 여운이 남아있다. 반면 괌의 일출은 좀 쿨한 편이다. 공중 목욕탕에서 뜨거운 열탕에 들어갈 때 손으로 한 번 휘휘 저어서 대충 감을 보고서는 어이쿠하면서 풍덩 뛰어드는 식이다. 이런 사람은 탕에 들어간 후에도 어허!하면서 한 번 진저리를 치고서는 처음부터 거기 있던 사람 마냥 태연하다. 괌의 일출이 그런 식이다. 어느새 번쩍 떠올라서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하루 종일 똑같은 모습이다. 스틸 사진 두어 장이면 괌의 일출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스틸 사진이니까 굳이 이걸 첫 순간부터 지켜 볼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먼저 타무닝, 투몬 사이에 있는 호텔에 방을 구한다. 타무닝과 투몬은 괌의 북서쪽 해안을 따라 있는 지역이다. 괌을 대표하는 해변을 끼고 있어 괌에서 가장 번화하다. 당연히 이 지역의 호텔은 비싸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돈을 더 주더라도 오션뷰로 예약해야 한다. 그 정도 가치는 충분히 한다. 그리고 잠들기 전 맥주를 500미리짜리로 한 캔 정도 마신다. 레이 감자칩이나 육포 같은 짭쪼롬한 걸 바스락거리면서 침대에 반쯤 누워서 마시면 금방 마신다. 비싼 곳에 있는 비싼 호텔이니 만큼 침대는 포근하다. 잠도 솔솔 온다. 이를 닦고 잘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로 의지력을 시험하면서 스마트폰을 조물락 거리면 대부분 깜빡 잠들기 마련이다. 깜빡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운 좋은 경우면 깬 김에 화장실도 가고, 화장실 간 김에 이빨도 닦으면 좋고. 그러고 나서 다시 쓰러져 잠들면 된다. 스트레이트로 숙면했으면 다음 날 눈만 뜨면 된다. 입냄새야 좀 나겠지만.
눈을 뜨면 당연히 어제 잤던 침대 위고, 에어컨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호텔의 침구류는 언제나 하얗고 기분 좋게 바스락거린다. 5월 말쯤, 옥상에서 반나절 정도 잘 말린 홑이불의 감촉과 냄새다. 에어컨 밖은 약간 서늘한데, 이불 속은 따뜻하다. 그런 침구류를 맨몸에 휘감고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이 괌에서 맞이 하는 아침이다.
이 순간만으로도 '괌에 오기를 잘했어'라는 생각이 든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몸에 휘감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면 이미 눈부시다. 바다는 파랗고 빛을 받아 반짝인다. 파도는 하얗다. 불붙은 도화선처럼 하얀 파도는 지글지글하면서 길게 이어지다가 사라진다. 리얼리티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밝고 조용하고 평화롭다.
내 마음이 평화로운 것인지 풍경이 평화로운 것인지 둘 다 그런것인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멀리 있는 바닷가의 흰 집은 햇빛을 받아 명암이 분명하다. 컨트라스트가 최대치로 맞춰진 화면처럼 선명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창밖을 보면서 빈둥거리다 보면 어느 순간 잠이 완전히 깬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생각난다.
'저절로 일어났구나. 알람도 없고, 아무도 안 깨웠는데'
혼자 히죽 웃고는 다시 잠이 든다. 천국에도 아침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기껏 천국까지 갔는데 알람 소리에 깜짝하고 놀라서 일어나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고 맞이하는 환하고 따뜻한 시간. 아침이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