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중간에 그냥 집에 가고 싶어지는 순간
직장 상사에게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언제나 해피엔딩이면 좋을 텐데, 상사와 발표자가 서로 윈윈 하는 프레젠테이션의 끝맺음이란 참 쉽지 않다.
폭망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머릿속에 정리한 흐름대로 프레젠테이션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음을 직감했을 때 시작된다. 중간 중간에 불쑥 치고 들어오는 상사의 냉철한 코멘트를 인정하는 순간의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말해야할 슬라이드가 한가득 남았지만, 매 슬라이드마다 코멘트가 쌓이기 시작하면 나는 점점 정신을 잃기 시작한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지고 마치 아무도 없는 우주에 혼자 남겨진 것 마냥 내 말소리만 내 귀에 잘 꽂힐 뿐이다. 그래도 나는 발표자니까 어떻게서든 이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해야겠는데, 남은 시간 아무리 잘해도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폭망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런 느낌적 느낌이 왔다면 다음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 셋 중에 하나로 마무리가 된다.
1단계 - 겨우겨우 문장으로 말을 하는 비교적 정상 단계
‘그래 어디 폭망한 프레젠테이션이 한두 번이냐, 지구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와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서 이 프레젠테이션을 끝내야 한다’고 긍정적인 주문을 빨리 건다. 중간중간 상사의 팩트 공격에 더듬더듬 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잘 끝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 나 자신을 칭찬해~’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1단계로 끝내는 것은 매우 양호한 수준이다.
2단계 - 단어로 말을 더듬 더듬 이어가는 단계
장시간에 걸쳐 상사나 주변 공유자들과의 이견이 늘어나면 내 멘탈은 버틸 수가 없다. 그래도 한가닥의 정신줄은 남아있다. ‘버티자…, 이렇게 중간에 끝내는 건 아니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단어를 내뱉으며 프레젠테이션을 힘들게 진행한다.
문장이 생각이 안난다. 이상하게 컨셉으로 잡은 키워드만 생각난다.. ‘웰니스!!!’, ‘소확행!!!’ …. 어버버 하다가 슬라이드쇼가 끝…
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래 단어라도 나열해서 다행이다’ 라며 나 자신을 격려한다.
3단계 - 말없이 스페이스바만 누르는 단계
폭망 프레젠테이션의 최고는 식음을 전폐한 사람처럼 내 목소리를 잃고, 말을 하지 않는 프레젠테이션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고?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이라면 가능하다. 왜냐면 디자인 시안을 크게 띄어놓고 스페이스바만 누르면 된다. 이미 앞에서 멘탈이 다 털렸기 때문에 뒤에서 회복될 가능성은 0 임을 인지한 상태…
‘그래 나의 부차적인 설명 없이 스스로 느끼는 느낌적 느낌이 더 좋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자신이 없다. 스페이스바를 누르면 누를수록, 분위기는 더 무거워짐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스페이스바’를 부지런히 눌러서 어서 슬라이드 쇼를 끝내자… 슬라이드 쇼가 끝나면 나도 끝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