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고르지 않은 계절에 쌓인다. 퇴사 23일차
엘리의 유치원을 지나다가 문득 엘리가 다녔던 원은 대부분 건물 안에 있었던 원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독건물이 아닌 그리고 집의 형상이나 학교의 형상이 아닌 그냥 빌딩에 하나의 층을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내가 영어유치원이나 국제학교라고 불리는 곳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 시작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나에게 학교는 직각의 낮은 건물이 몇 동이 있고, 내 기억으로는 수돗가가 딸려있고, 흙먼지가 날리는 넓고 넓은 운동장이 있고, 교문 앞에는 떡볶이 집과 문방구가 있어야 하며, 그 앞에는 차도나 주차장이 아닌 낮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 그런 학교는 하원 이후부터 늦은 저녁 시간까지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렇기에 와이프가 알아보고 있는 국제학교라는 곳은 아침부터 늦은 오후, 적어도 5시까지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고, 원하면 5시 이후에 누군가가 아이를 받을 수 있는 장소로 데려다 주기까지하는, 우리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녀석에게 학교는 80년대의 국민학교 생활을 했던 아빠의 학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 되려고 한다.
기존에 작성했던 글들을 모으고 몇 몇 주제는 새로 쓸 생각으로 첫 책의 목차를 얼추 작성했다. 30대가 되기 전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내 이름으로 된 책 쓰기가 엘리와 관련된 일상을 적는 책이 될 줄이야. 20대의 무모함과 30대의 에너지 보다 40대에 엘리와 함께 했던 일상과 생각들이 지금의 나와 우리 가족을 나타내는데 가장 좋은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올곧이 나를 들여다 보는 시선이기 때문에 그래도 즐겁게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엘리를 하원시키고 저녁을 먹는 동안에 피곤했는지 녀석은 눈꺼풀이 반쯤 내려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공부방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Haunted house를 이번주 토요일에 하기로 약속했다며 떼를 쓰더니 이내 잠이들었다. 20여분을 잤을까. 녀석을 깨워서 가까스로 공부방에 데려갔지만 녀석의 피곤한 뒷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다. 7살인데…
@2021년 9월 1일 / D+6년 0개월 30일
우리가 기억하는 '학교'는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감각과 마음의 풍경이야. 에디가 말한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 떡볶이 냄새 나는 문방구, 교문 앞의 작은 골목은 단순한 장소의 조합이 아니라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던 가장 따뜻한 구조물이었겠지.
그런 공간은 이제 빌딩의 한 층, 누군가의 선택지 안에 자리 잡았고, 그 선택은 너무도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어. '내가 꿈꾸는 공간'과 '내가 선택한 공간' 사이에서 에디가 보여주는 솔직한 감정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사랑스러워. "80년대 국민학교를 다닌 아빠"와 "2020년대 국제학교를 선택한 부모"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 간극은, 누군가에겐 현실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자각이야.
책을 쓰는 일이 버킷리스트였다고 했지만, 이 글 안에서 나는 이미 ‘완성된 마음’ 하나를 본 것 같아. 사랑하는 딸의 삶을 함께 써 내려간다는 건 그 자체로 문장이 되거든. 피곤한 눈을 억지로 떴다가, 택시에서 쏟아지는 잠에 무너져버린 여람이. 그 모습에 불편함을 느낀 아빠의 마음. 그건, 사라지는 순간을 애써 붙잡아두려는 사랑의 모양이야.
“아직은 7살인데…”
이 문장에서 멈춰 선 감정이 너무 진해서, 그 여백이 오래 남았어.
우리가 진짜로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더 나은 공간보다 더 오래된 기억일지도 몰라요.
– 영화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받은 인상에서, 당신의 기록을 보며 레이첼이
엘리야,
아빠는 너와 함께 보낸 매일매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그건 너의 하루를 기억하려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아빠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해. 나중에 너도 어른이 되면, 너의 하루를 마음으로 기록해볼 수 있을까? 7살이란 나이, 그 작은 어깨로도 세상은 참 무거웠을 거야.
하지만 엘리의 하루가 항상 사랑으로 감싸지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