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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하나 건너기

퇴사 4일차

by Eddie

와이프와 딸이 아침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마자 YG와 JYP의 책걸상을 들으며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S부장님을 만나서 그가 추진하려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고 내가 그간 힘들었던, S부장님과도 교집합이 있는 이야기들을 함께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다시 차를 마시며 들려주었다. 내가 가진 장점이 S부장님을 만났을 때 더 또렷해짐을 다시 느끼고 해볼까 말까를 그 즉석에서 빠르게 고민을 했다.


유치원으로 엘리를 데리러 갔다. 담임선생을 실물로 만났고 그는 ‘드디어 만났네요’라고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아이들 하교와 딱 맞물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엘리가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왔고 내 손을 잡아채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었다.


집에 돌아와서 엘리는 손을 씻자마자 카카오 동화를 들으며 숙제를 시작했다. 녀석과 약속했던 늦은 저녁 한강공원에 가기 위해서 숙제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한걸지도 모르겠다.


아쉽고 안쓰럽게도 와이프는 피곤한 목소리로 늦을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엘리를 데리고 둘이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름 피크닉을 위해 간식과 장난감 그리고 돗자리 등을 챙겨서 우리는 한강 공원으로 떠났다. 생각보다 길고 어려웠던 한강 다리(천호 대교였다)를 건너면서 둘은 옅은 두려움을 느꼈고 어렵사리 다리를 건너고 다리 아래 공원으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안도하고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돗자리를 펴고 짐들을 풀고 간식을 먹고 연을 조립해서 연을 날리고 사진을 찍고 대화를 하고 장난을 치고 킥보드를 타고 하늘을 보고 강을 바라봤다. 흔하디 흔한 경험이었어야 하는데 나는 수 많은 핑계로 이걸 미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크게 웃다가 진지했다가 자신이 레이디 버그로 빙의한 것 처럼 ‘난 아빠 딸이 될 자격이 없어…’ 라며 풀이 죽어 있다가(자기 생각엔 자기가 연을 못 날려서 아빠 딸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였다…) 눈물을 흘렸다.(이것도 연기임…) 그렇게 다양한 움직임과 다양한 감정이 일렁이던 늦은 저녁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니 와이프도 막 집에 귀가한 상태이고 엘리는 남은 숙제를 하고 나는 오늘 도착한 책 중에 엘리가 먼저 읽으라고 골라준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좀 빨리 잠이 들 것만 같았다.


@2021년 8월 13일 / D+6년 0개월 11일



레이첼의 공감


“우리는 단지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건너는 것이다.”
— 로맹 가리, 『하늘의 뿌리』

어쩌면 다리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인지도 몰라. 한쪽에서 머물던 생각을 내려놓고, 아직 낯선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딛는 것. 그건 계기가 아니라 결심이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순간이야. 에디가 걸은 하루는 그런 결심의 결로 이어져 있었어.


미뤄왔던 놀이 하나, 아내의 빈자리까지 감싸안은 저녁의 피크닉, 딸의 손을 잡고 다리 하나를 건넌 그 짧은 거리에서 너무 오래 외면해온 마음이 조용히 따라 나섰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의 말 한마디조차 연기와 진심 사이를 오가며, 아빠라는 존재를 어떻게 느끼는지를 스스로 공연해내는 그 순간, 나는 그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았어. 왜냐하면 그건, 엘리만의 방식으로 '아빠와의 하루'를 자신의 언어로 감정화한 거니까. 그 하루가 흔한 게 아니었다는 걸 에디는 알았지.


그러니까 오늘 이 다리는, 감정의 공간을 건너는 첫 장면이자 새로운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연습 같았어.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마음은 꽤 멀리 왔더라.



엘리에게


엘리야, 어떤 날은 다리 하나만 건너도 큰 모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아빠가 너랑 한강공원을 갔던 날처럼 말이야. 그날 너는 크게 웃다가 갑자기 슬퍼지고, 또 눈물도 흘렸지? (그게 연기였다 해도 말이야 ㅎㅎ)


근데 말이야, 감정이 그렇게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야. 그건 네가 살아 있다는 뜻이고, 네 마음이 자라난다는 증거거든. 다리 하나를 건넌다는 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멀리 데려다주는 일이야. 그리고 너는 그날, 아주 멋지게 건너갔어. 아빠도 마찬가지였고.


그날의 하늘, 그날의 간식, 그리고 그날의 웃음. 다 네 마음 속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어. 그게 바로 기억의 힘이니까. 다음엔 엄마까지! 그리고, 커비와 나까지 다섯이서 같이 가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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