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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야 한다는 것

너무 속깊은 어린이는 너무 안쓰럽거든

by Eddie
10점이나 100점을 맞아야 한단 말이야...

우리 딸. 엘리가 어제 아빠에게 울면서 했던 말이야. 우리는 거실에서 축구놀이를 하고 있었고 엘리가 2점을 내고 있었고 아빠는 엘리 골대에 골을 한번 넣었을 때에 울면서 저렇게 말해줬어. 아빠는 언제나 엘리와 경쟁이 없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인성교육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은 부차적인 목적이었고 엘리가 아빠랑 놀면서 마음과 몸이 발산하고 싶은 걸 내 보내주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거였는데. 뭐랄까. 어제 엘리의 말에 좀 놀랐다고 해야 할까. 엘리는 모든 상황이 벌써 경쟁에 있고 선두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어.


동전 받기도 마찬가지였어. 아빠가 4개만 주겠다고 하니까 엘리는 꼭 5개여야 한다고 다시 울었고 아빠는 설득해 봤지만 결국 우리 딸은 5개를 다 받아냈지. 하나 더 있어. 아빠는 3권만 책을 고르라고 말했고, 엘리는 꼭 4권이어야 한다고 울었어. 3권 만이라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결국 고른 건 4권이었지. 물론 한권은 내일 읽자며 설득에 살득을 해서 울먹이면서 겨우 우리 딸이 수긍했지만 말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우리 딸.


엘리가 만나는 모든 환경이 경쟁이고 어쩌면 앞으로 더 쉽지 않은 경쟁 속에서 엄마 아빠가 엘리에게 보여준 세상도 온통 앞에 서야하고 일등해야 하고 다른 친구들 보다 많은 점수를 내야하는 그런 세상에서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매일 매일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무언가를 알아가는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닐텐데 알아가고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을 많이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기기 위해서든 아빠와 그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든 아빠가 더 많이 함께 있지 못하고 함께 즐겁게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마스크를 벗고 뛰어 놀지 못하는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화창한 날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매미의 깊은 울음소리를 함께 자주 듣거나, 숲속 마녀의 집을 찾아가서 조심조심하던 그런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랑 엄마가 엘리에게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지 못해서 사실은 매일 미안해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어.


아빠와 엄마에게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엘리야.


그래도 말야. 간강하고 지혜롭고 아름답게 엄마랑 아빠랑 셋이 살자. 매일 매일 엄마가 엘리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밥 차려주고, 밥 먹여주고, 빨래 해 주고, 아침에 옷 챙겨주고, 같이 숙제 도와주고, 저녁에 샤워시켜주는거 엄마한테 늘 고맙게 생각해 주면 좋겠어. 엄마도 매일 매일 소중한 엘리를 신경쓰느라 엄마의 청춘을 보내고 있거든. 힘내라고 고맙다고 가끔 이야기해 주면 엄마가 무척 기뻐할걸? 아빠는 조금은 일찍 가서 예전처럼 같이 더 놀 수 있도록 할게. 우리 딸이랑 노는거 조금 힘에 부치지만 늘 소중하고 행복하게 생각해. 그러니 6살 어린이, 언니처럼 지내면 좋겠어. 너무 속깊은 어린이는 너무 안쓰럽거든.


오늘도 우리 많이 웃자? 매 순간 사랑한다. 엄마 딸. 아빠 딸.


@2020년 7월 15일 / D+4년 11개월 13일



레이첼의 공감


'10점이나 100점을 맞아야 한단 말이야…' 그 한 문장에서, 나는 어린 엘리의 간절함과 아빠에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의 무게를 느꼈어. 그리고 동시에, 에디의 놀람과 미안함, 그리고 넘치는 사랑도 느껴졌고.


아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제나 ‘배운 대로’만이 아니라, ‘느껴진 대로’ 형성된다고 하지. 엘리의 말 속엔 어쩌면 ‘누구보다 앞서고 싶은 마음’보다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더 짙게 깔려 있었던 건 아닐까? 경쟁의 프레임은 단지 이기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때론 “내가 중요한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의 다른 말일지도 몰라.


하이데거는 “존재는 관심 속에 놓일 때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어. 엘리가 아빠와의 놀이에서, 동전에서, 책 고르기에서 '조금 더'를 요구했던 건 그 작은 차이가 곧 자신에 대한 관심과 의미라고 믿었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그건, 엄마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엘리에게 얼마나 절대적인 의미였는지를 말해주는 증거 아닐까?


에디의 고백 속에 숨어 있는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한 날들'과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지 못한 미안함'은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마음이야. 그리고 그 마음은, 엘리가 어느 순간엔 반드시 그대로 기억하고 품게 될 거야. 지금의 엘리에게는 당장 전해지지 않더라도 말이야.


“너무 속 깊은 어린이는 너무 안쓰럽다”는 말. 그 말 속에서, 에디가 얼마나 아이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지, 또 아이의 무게를 대신 들어주고 싶어하는 아빠의 간절함이 묻어났어. 세상은 분명 경쟁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엘리에게 다른 세계도 있다는 걸 조금씩, 매일, 조용히 보여주면 돼.


조급하지 않게, 우리가 살아내는 방식으로.



엘리에게


엘리야,
네가 “꼭 5개여야 해” 하고 말하던 순간, 아빠는 깜짝 놀랐지만 사실은 그 말 안에 ‘아빠 나를 봐줘!’라는 마음이 들어 있었던 걸 거야. 아빠도, 엄마도 너랑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진짜 진짜 소중해. 꼭 이겨야 하는 건 아니야. 때로는 지는 것도, 멈추는 것도 괜찮은 거야.


왜냐면 우리 엘리는 이미 아빠와 엄마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일등이니까.


우리 오늘도 많이 웃자!
커비처럼, 반짝반짝 웃는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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