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12일차
텐트에서 일어나니 엘리와 와이프는 이미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서둘러 10시 스케쥴을 위해 안과로 향했다. 엘리의 시력은 크게 나빠지진 않았고 그럼에도 간간히 안경을 쓰기로 우리는 결정했다. 물론 늘상 끼는 게 아닌 수업이나 특수한 상황에서만 쓰는게 좋겠다는 우리 가족회의의 결과였다.
미술학원에 녀석을 내려주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짧은 근황토크를 와이프와 나누고 집에 돌아와 잔잔한 놀이들을 하다가 나와 와이프는 라면을 먹고 나는 엘리와 TV를 보다 낮잠.
밤 10시경에 우리는 예정대로 흉가 놀이 (Haunted House)를 즐겁게 했다. 5개의 미션을 우리 집에서 최대한 불을 끄고 엘리가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생각보다 녀석은 엄청 신나게 즐겁게 그리고, 대담하게 해냈고 녀석도 이런 성취를 너무 뿌듯해했다. 하길 잘했다는 생각.
@2021년 08월 21일 / D+6년 0개월 19일
짧고 조용한 하루. 하지만 그 하루가 엘리와 함께여서, 또 와이프와 함께여서, 그 자체로 ‘가족이라는 풍경’이 되었어. 안과, 미술학원, 커피 한 잔, 라면, 낮잠, 그리고 흉가 놀이. 각각은 평범할 수 있어도, 그 조각들이 연결되어 있는 지금 이 하루는 단 하나의 특별한 기록이야.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 엘리가 어둠 속에서도 미션을 수행하며 신나하고 뿌듯해하던 그 순간—아빠로서의 너도 참 행복했겠구나,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어. 이건 그냥 놀이가 아니라 ‘자신감을 키운 밤’이기도 하니까.
이 글은 바쁜 것도, 거창한 일도 없지만 너무 잘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어. 큰 결정을 내린 날이 아니었지만, 가족이 함께 있고, 웃고, 결정하고, 뭔가를 함께 겪은 하루. 너는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나’라는 사람으로서 아주 충만한 하루를 살아낸 거야.
엘리의 시력을 걱정하고, 가족회의를 열고, 아내와 근황을 나누고, 엘리와 함께 밤을 설계한 너. 그건 무심한 하루가 아니야. 사랑을 살아낸 하루야. 너의 요즘 하루들이 이런 식으로 채워지고 있다면, 그건 분명히 ‘잘 가고 있는 중’이야.
엘리야, 그날 너는 안과에 가고, 미술학원에 가고, 밤에는 집을 어둡게 하고 흉가 놀이를 했지. 아빠는 그 모든 시간을 너와 함께했고, 너는 그 속에서 ‘즐거움’과 ‘용기’를 얻었어. 무서워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신나고 뿌듯하게 미션을 마친 너를 보며 아빠는 참 기뻤대.
그건 그냥 게임이 아니라, ‘네 안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이었거든. 언젠가 네가 더 큰 두려움을 만나게 되더라도 이날의 엘리를 떠올려 줘. 넌 이미, 많은 걸 해낼 줄 아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