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 되었고 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했다. 9시가 되자마자 전화가 한 통 왔다.
요즘 수를 괴롭게 했던 A회사의 한 과장이었다. 수는 '괜찮아'라고 혼자 주문을 외우고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한 과장님, 김수입니다.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네, 김 과장님. 저번에 제안 주셨던 소프트웨어요. 그거 저희 부장님이 50% 정도는 할인해 줘야 살 수 있다고 하시네요. 경쟁사 제품이 저희한테 60% 할인율을 제공한다고 해서 뭐 저도 딱히 방법이 없는데요. 할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과장님. 저번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50%까지는 회사 정책상 어려운 상황이에요. 저희 회사가 사업 시작한 이래로 50%로 고객사에 납품한 이력도 없었고요.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저희 상무님 통해 승인받은 할인율이 25%입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경쟁사 제품은 저희와 성능상 비교하기 어려운 제품입니다. 일전에 벤치마크 테스트하셨던 것처럼 저희가 성능이 3배가 빠르지 않습니까. 한번 더 고려 부탁드립니다."
"김 과장님, 그래도 한번 다시 알아봐 주세요. 25%로 유지하시면 저희는 경쟁사 제품으로 넘어갈 거예요. 최소 40%는 되어야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메일 한 통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다시 한번 내부적으로 보고 올리고 방법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이걸 뭐 또 굳이 메일로 남기라고요? 제가 이미 다 말했잖아요. 과장님은 융통성을 좀 기르셔야겠어요."
"저도 고객이 보내주신 메일로 내부 보고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상 효과적이어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지금 말로 이미 했잖아요. 그 내용을 뭘 또 메일로 쓰라고 하세요. 저 바쁘거든요. 오늘 중에 답 주세요."
한 과장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당황한 수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는 고객과의 통화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혼자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앉았다.
‘한 부장이 고객 요구사항 메일로 안 받아놨다고 또 엄청 뭐라고 할 텐데…’
10여분을 바닥에 앉아있던 수는 다시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주말 새 온 이메일들을 읽고 오늘, 그리고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B회사의 지 매니저였다. 무언가 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수는 바로 메시지를 읽었다.
'김 과장님, 저번에 주신 계약서 수정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서비스 변경 시 180일 전에 알리겠다는 문구를 360일 전으로 바꿔주세요.'
지 매니저의 계약서 변경은 벌써 9번째였다.
수는 그에게 질릴 대로 질렸지만 그래도 일을 해야 했다. 지 매니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는 카톡으로 우선 답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지 매니저님, 김수입니다. 말씀 주신 부분은 제가 저희 법무팀에 확인하고 회신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전에 왜 그러한 문구 변경이 필요한지 알려주시면 저도 저희 내부 법무팀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덧 주간 회의가 시작되었고 수는 회의에 참석했다. 세일즈 1팀 총괄인 한 부장이 미팅을 진행하였다. 한 부장은 이 회사에 온 지 2개월밖에 안되었던 터라, 회사에 성과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팀원 8명에게 한 명 한 명씩 올해 얼마를 팔 수 있는지, 세부적으로 딜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김 과장, 올해 목표치 얼마나 할 것 같나?"
"네, 100%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노력 말고 얼마 할 거라고 예상하냐는 말이야."
"네, 지금으로서는 80% 예상하고 있고, 대기업 위주로 추가 판매해서 100% 채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래, 세일즈는 숫자가 생명이야. 다들 숫자 못 채우면 집에 갈 준비 하면서 일해."
"네"
“김 과장, 그리고 B기업건 언제 딜 되는 거야? 계약서만 천년만년 고치고 있을 거야?”
“아, 네.. 이제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습니다.”
“김 과장 너 저번 달에도 거의라고 했던 거 알지? 빨리 마무리를 지으란 말이야. 고객한테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마무리짓겠습니다.”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김 과장이 여자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 일을 수동적으로 하나?”
“빠르게 마무리짓겠습니다.”
“그래, 이번 달에는 꼭 계약해. 남자들은 가족 먹여 살리려고 일하는데 여자들은 자아실현하려고 일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이렇게 간절하지가 않지.”
“....”
“이번달에 계약해. 안 그러면 그 딜 박 과장한테 넘길 거니까 그렇게 알아.”
수는 한 부장의 발언이 성차별적이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수는 나도 회사에서 자아실현할 생각 하나도 없다고 나도 먹고살려고 일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한 부장의 이런 발언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종종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곤 했고 팀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수는 그 발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수는 이 일을 인사팀에 이의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회사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또 다른 싸움을 하나 시작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게 느껴졌던 세일즈 미팅이 끝났고 수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A회사 한 과장이 추가할인을 요구했다는 것은 아예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오후에 다시 타이밍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오전시간을 일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수는 팀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자고 말할까 두려워 빠르게 자리를 떠나 버스를 탔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두 정거장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 거의 매일같이 가는 곰탕집에 들어갔다.
"보통 하나 주세요."
수는 종종 회사 앞 식당에서 혼밥을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한 부장을 식당에서 만났다. 그 날 수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수는 그날 이후로 아예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혼자 있고 싶었고 특히나 한 부장과 만날 확률이 0이기를 바랐다. 회사에 돌아가면 한 부장을 비롯한 회사 사람들과 고객들이 계속해서 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니 점심시간에 홀로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다.
홀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수는 그날 오후를 바쁘게 보냈다. 한과장건을 보고했고 예상대로 한 부장에게 한바탕 혼이 났다. 일처리를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냐며 왜 일을 두 번하게 하냐며 지적을 받았다. 수는 한 부장의 말대로 자신이 일을 못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자책을 했다. 보고 후 자리에 돌아와 잔업들을 처리했다. 다만 저번 주 정신과 의사가 가급적 야근은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였기에 저녁 7시에 사무실을 나섰다.
동네 지하철 역에 도착하자 수는 집 대신 찻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은 남편이 회사에서 회식이 있는 날이라 바로 집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수는 집 대신 찻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찻집은 전에 왔을 때처럼 한산해 보였다.
저녁을 먹지 못한 수는 배가 고팠다.
"간단하게 저녁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혹시 있나요?"
수가 묻자, 윤이 대답하였다.
"네, 여기 하이티 세트(high tea set)를 추천드릴게요. 파이와 티 조합으로 드실 수 있어요. 파이는 고기 파이와 애플파이 중에 고르시면 되고요. 티는 저희 티 중에서 원하시는 티를 고르시면 되세요."
"혹시 밀크티 중에 카페인이 없는 밀크티도 있나요?"
수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퇴근 전까지 커피를 여섯 잔이나 마셨기 때문에 더 이상 카페인을 섭취하고 싶지 않았다.
"네 루이보스 밀크티는 카페인이 없어요."
"잘되었네요. 그럼 고기 파이와 루이보스 밀크티로 할게요."
수는 어제처럼 식물들이 배치된 쪽으로 앉았다. 고요하게 들려오는 음악은 마치 명상 음악 같았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에서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듯했다.
수는 가만히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목표치를 하지 못하면 집에 가라는 한 부장과 말도 안 되는 할인율을 요구하는 고객과 9번째 계약서 변경을 요구하는 고객 등을 떠올렸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하루하루 출근할 때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아. 그런데 또 일 안 하면 뭐 해. 돈을 벌어야 아파트도 사고 아기도 낳고 그러지 않겠어?'
수는 혼자 생각했다.
"하이티 세트 나왔습니다."
윤이 다가와 하이티 세트를 수의 테이블 위에 서빙해 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근데 이 음악은 뭔가요?"
"아, 이 음악은 티베트 명상 음악이에요. 제가 요가할 때 종종 틀어놓는 음악인데 이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오늘의 음악으로 골라봤어요."
"그렇군요."
수는 루이보스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진하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부드러움이 있었다. 카페인이 없어서인지 공간이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 수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고기 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데다 식감 역시 부드러웠다. 가벼운 저녁을 하기에 적당한 양이었다.
수는 식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내일 회사 가는 게 두려워. 그래, 오늘은 어쨌거나 잘 해냈지만 내일 또 갈 생각을 하니 두려워. 잘할 수 있을까? 죽고 싶다...'
다음 날 수는 출근 준비를 하고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탔다. 수는 회사에 가려면 열 정거장째에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탄 뒤 여덟 정거장을 더 가야 했다. 그날도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두 대를 보내고 수는 세 번째로 온 지하철을 탔다. 그 지하철 역시 만원이었다. 하지만 타야 했다. 지하철에 탄 수는 여느 때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서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숨 쉬는 게 답답했다. 그리고 다섯 정거장이 지나자, 수는 숨을 쉬는 게 답답함을 넘어 어렵다고 느꼈다. 짧게 숨을 여러 번 내쉬었는데 자꾸만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곧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수는 급하게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혼자 헛구역질을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수는 급하게 카드를 찍고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가까스로 지상으로 가서 바깥공기를 맡으니 숨이 잘 쉬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바로 서서 심호흡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수는 오늘 회사를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부장님. 저 김수입니다. 제가 오늘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출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일에 이렇게 갑자기 말씀드려서.."
"그래? 무슨 일인데?"
"아,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요."
"어디가 안 좋으신가?"
"네, 허리를 좀 다치신 것 같아요."
"알았어. 어머니 잘 보살펴드리고."
"네, 부장님 죄송합니다."
수는 전화를 끊고는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숨을 잘 못 쉬겠어서.. 있다가 시간 되면 연락 줘.'
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정신과 예약은 금요일이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수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 날짜를 당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다음날 오전으로 진료 시간을 바꾸었다. 수는 침대에 누웠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나 정말 아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