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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Feb 16. 2024

내게도 겨울잠이 필요해

수의 회사는 실적 악화로 또 한 번 구조조정을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수는 아직 젊은 30대라 구조조정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연차를 쓰는 것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연차를 냈다. 수는 내일 오전에 정신과 진료도 받아야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만 더 쉬고 회사를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는 그날 저녁 한 부장에게 다시 연락해 수요일에도 연차를 쓰겠다고 대신 진행 중인 딜(deal)들에 문제없도록 그리고 혹여나 일들이 생기면 집에서 처리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수는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누워 가만히 생각했다. 

‘그만 살고 싶어. 죽으면 이렇게 일할 필요도 없잖아. 그냥 죽어서 편하게 쉬고 싶어.’ 

이때였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수, 괜찮아?”

“응, 뭐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수는 오늘 하루만도 몇 번이나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남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일하느라 지친 남편에게 하나의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 근데 오늘 또 야근을 해야 할 것 같아. 오늘 같은 날은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

“괜찮아. 바쁜 거 너무 잘 아는데 뭐…”

“응, 최대한 빨리 마치고 갈게.”

“응, 힘내.”

수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이 되어 수는 정신과에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는 전날 출근하면서 겪은 일을 의사에게 말해주었다. 

“스트레스성 과호흡으로 보입니다. 아마 출근해서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크셨던 것 같아요. 그러한 스트레스로 숨이 가빠지고 호흡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네 그렇군요. 내일 회사 가는 것도 사실 너무 두려워요.”

“수님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음…”

“...”

“일이요. 저는 일이 저를 압도하고 있다고 느껴요.. 그러니까 내일 회사를 가면 계약서 수정도 알아봐야 하고, 개별 건들에 대해 할인율도 다시 승인받아야 하고요. 그리고 이틀 동안 밀린 일까지 생각하면 아마 주말에도 계속 출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내일도 회사에 가다가 과호흡으로 회사에 못 가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평소보다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건가요?” 

“네, 몇 달 전부터 일이 거의 두 배가 되었어요.” 

의사는 수가 자주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가 있으며 이와 더불어 스트레스성 과호흡까지 더해져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의사는 수에게 가능하다면 두 달 정도의 휴직을 해볼 것을 권했다. 지금의 일들을 멈춰두고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수는 어른이 된 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스무 살 때는 재수를 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느라 방학을 제대로 즐겨보지 못했다. 대학원에서도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바쁘게 살았고 지금 회사에 와서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려 두 달을 멈추라고 하니 수는 덜컥 겁이 났다. 수는 의사에게 휴직 여부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답을 한 후, 병원을 나왔다. 일주일 후로 다음번 진료 예약을 하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향하였다. 그러다 문득 공원 부근에 있던 찻집이 생각났다. 

“잠깐 쉬었다 가야겠어.” 

수가 찻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또 와주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수는 오늘도 식물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가서 메뉴를 둘러보았다. 

“음… 차를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손님 오늘 조금 지쳐 보이시는데 카모마일 티는 어떠세요? 카모마일은 피곤하고 긴장될 때 마시면 몸을 이완시켜 주거든요.”

“네. 좋을 것 같아요. 카모마일 한 잔 주세요. 따뜻한 걸로요.”

“네, 알겠습니다.”

수는 스마트폰을 꺼내 다시 한번 자신이 적었던 메모를 읽어보았다. 

‘죽고 싶은 밤이다. 죽고 싶다. 왜 사는 걸까.... 내일 또 한 주가 시작되고 나는 출근을 할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일이 너무 많고 고객들은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만두면 돈은 누가 버나... 쳇바퀴 같은 인생... 기대되는 게 하나도 없다. 죽고 싶다.’

그러고 나서 수는 이번주에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월요일에 있었던 한 부장과의 주간 미팅, 고객들의 끝없었던 요구사항들, 화요일 출근길에 과호흡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던 일, 그리고 오늘 정신과에서 휴직을 권고받은 일을 떠올렸다. 휴직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회사의 구조조정 시기에 괜히 휴직을 냈다가 잘리거나 혹은 완전 한직으로 밀려날까 겁이 났다. 덤으로 사람들이 우울증이라며 자신을 두고 뒤에서 수군수군 댈 것을 생각하니 더 내키지 않았다.  

“차 나왔습니다.”

윤이 차를 들고 오더니 수의 테이블에 티팟과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수는 차를 우리면서 잠시 식물들을 바라보았다. 관리가 소홀했던 건지 수의 옆에 자리 잡은 식물의 잎이 시들어 보였다.  

“이 식물은 시들어가고 있는 건가요?”

수가 윤에게 물었다.  

“이 식물은 스테파니아 세파란타라는 식물인데요. 겨울잠을 자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겨울에는 물을 주고 영양제를 줘도 좀처럼 자라지 않아요. 오히려 이렇게 잎이 마르고 시들어요. 겨울 내내 이렇게 움크러져있다가 봄이 오면 순이 나고 줄기도 빠르게 자라요. 그러니 이 친구에게 겨울인 지금은 에너지를 충전하고 쉬어가는 시간인 거지요.” 

“그렇군요. 식물의 겨울잠이라.. 재밌네요.”

수는 티팟에 있는 차를 찻잔에 조심히 담았다. 차소리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수는 차를 마시며 가만히 앉아있다가 문득 민이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소진되는 성향이었던 수는 상당히 소수의 사람과만 교류를 해왔다. 그런 수에게 민은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수는 중학교 1학년 때 민을 만났는데 둘은 말이 잘 통하고 둘 다 영화 보기를 좋아해서 쉽게 친구가 되었다. 둘은 중학교 이후로는 같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취직한 이후에 직장도 달랐지만 같은 동네에 살아 적어도 일 년에 두세 번은 만나왔다. 수는 어려운 일이나 고민되는 일들을 민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과 함께 있으면 그러한 걱정들이 가벼워졌었다. 민은 수와는 달리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매사 적극적이고 밝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민의 성격은 취직 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민은 공기업 정규직 취업을 준비했지만 100:1에 이르는 경쟁률을 뚫고 취직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민은 2년간의 시도 끝에 도전을 그만두고 모 공기업의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 생계를 꾸려야 했던 민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계약직이었던 민은 1년마다 계약 갱신이 필요했고 계약시즌마다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고생을 하였다. 

“회사 사람들 말이야. 어쩔 때는 나도 자기들과 같은 팀원이라고 하다가 어쩔 때는 당신은 계약직이니까 우리랑 다르다고 선을 그어. 어제는 나 몰래 자기들끼리 회식을 했더라고… 너무 치사하지 않아? 나도 이런 대접받기 싫어서 다른 회사도 계속 알아보는데 면접조차 불러주는 회사가 없어. 대체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던 민은 어느 날부터 수에게 호주 이민을 이야기했다. 민은 대한민국 땅에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여기서  하위 계급인양 차별받으며 희망 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의 나라에 가서 맨땅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에게 리셋의 기회를 주고 싶다며. 수는 민이 없는 한국에서 사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민에게는 호주로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처럼 보였다. 민은 많은 고민 끝에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어느덧 민이 호주로 간지 3년 여가 흘렀다. 

지난 3년간 둘은 카톡으로 연락했지만 그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수는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적어져서 그랬을 것이라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차를 마시던 수는 스마트폰을 열어 민의 카톡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카페에서 브런치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밝은 민의 표정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예전에 그 밝은 민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민에게 연락을 해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였다. 

“차 잘 마셨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수는 집으로 걸어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오랜만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하였다. 수는 병원에서 의사에게 휴직을 권유받은 것을 말해주었다. 

“수, 휴직하자.”

“근데 나 두려워. 괜히 두 달 휴직했다가 복귀하지 못할까 봐. 그리고 두 달 만에 우울증이 회복될지 안될지도 모르잖아.”

“네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어떤 거야?”

“회사 복귀했는데 얼마 안 가 권고사직 받는 거.”

“혹시 권고사직 받으면 다른 회사 알아보면 되잖아. 회사가 거기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 세일즈 업무 잘 안 맞았는데 꾸역꾸역 한거였자나. 잘리면 그 참에 진짜 적성에 맞는 일 찾아볼 수도 있는 거고.”

“우리 돈 없잖아. 내가 한가하게 적성 따지며 일할 상황은 아니잖아. 그래서 언제 아파트 사겠어”

“내가 열심히 일할게. 지금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수는 남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너 자신에게 멈춤의 시간을 줘. 나도 널 도울게.”

수는 그날 밤 남편과 이야기 한 끝에 휴직을 내기로 결심을 했다. 두 달간의 부재로 회사에서 불이익이 발생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아직 젊으니까 혹시라도 해고당하면 또 길을 찾으면 될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다음날 수는 한 부장을 만나 휴직을 논의했고 한 부장은 내키지 않았으나 수의 병가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 부장은 수가 우울증으로 병가를 낸다는 사실이 자신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인사팀에 수의 병가 사유에 대해 사생활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는 세일즈팀의 다른 팀원에게 약 2주간 인수인계를 한 후 휴직을 하는 것으로 한 부장과 합의하였다. 그렇게 수의 휴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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