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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Feb 16. 2024

자신을 위한 조금의 배려

이윽고 생강차가 나왔고 수는 차를 마시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수는 학부 때 사회학을 공부하였는데 학점이 높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있어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었다. 수에게는 이미 학자금 대출 2,500여만 원이 있는 상태였기에 경제적 상황을 생각하면 학부 졸업 후 취직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학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마침 전액 장학금을 받고 석사 진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대학원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학비 외에도 들어갈 돈이 많았지만 일단 수는 자신에게 공부를 할 기회를 주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수는 생활비 대출을 받아 생활을 이어나갔고 종종 교수님의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연구비로 몇십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점차 늘어가는 대출금액을 보며 그리고 늘지 않는 자신의 논문 실력을 보며 이제라도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실제로 수가 속한 연구실 학생 5명 중 생활비 대출을 받고 어렵게 공부를 이어가는 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네 명은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거나 교수였다. 그들은 부모님께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었고 대중교통이 번거롭다며 차를 끌고 다녔다. 수는 자신의 동기들과 자신의 경제적 차이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수는 석사를 마쳤고 미국 대학에 박사과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수의 열정과 달리, 지원한 열 군데 중 한 곳도 수에게 면접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도교수는 1년을 더 해보자고 권했다. 하지만 생활이 빠듯했던 수는 1년을 더 시도해 볼 경제적, 심리적 여력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5,000만 원으로 늘어난 대출과 평생을 육체노동을 하느라 자신의 나이보다 10살은 더 들어 보이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이에 수는 자신의 기회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며 학자로서의 길을 단념했고 그때부터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는 자신의 연구실 동기들에게는 자신에게는 없는 보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보험. 여유 있는 부모가 있는 이들은 실패를 해도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부모 밑에 있으면 기회가 잘 오지 않고 오더라도 그 기회는 대개 한 번뿐인 것이다. 수는 자신에게 미국 유학을 갈 기회가 한 번이 있었고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이제 다음 기회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취업을 알아보던 수에게 마침 A회사에서 면접 제안을 했고 수는 최종합격하여 다행히 그 회사로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A회사는 대학원생들에게도 학부생과 동일한 조건의 제안을 했고 부서 배치도 통보식으로 진행했다. 수는 자신의 적성이나 계획에 대해 면담해 볼 기회도 없이 세일즈팀으로 발령받았고 기업고객을 상대하는 B2B 영업을 하게 되었다. 혼자 도서관에 가서 하루종일 논문만 쓰던 수에게 매일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 세일즈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수는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수는 일에 잘 적응한 듯이 보였고 수는 일을 시작한 지 3년여 만에 대출을 다 갚았다. 대출을 다 갚고 이제는 결혼자금만 열심히 모으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엄마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수는 자연스레 결혼자금과 어머니 생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하였다. 수는 이렇듯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이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 정말 애썼네.’

수는 지난 시간 동안 아등바등 살아온 자신에게 새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음 날 수는 아침을 챙겨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였다. 그리고는 뭘 할까 망설이다가 또다시 찻집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와주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카모마일 차 한잔 주세요.”

“네, 그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수는 실내정원을 바라보고 앉아 식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수는 스마트폰을 열어 예전에 썼던 메모를 다시 읽어보았다. 

‘죽고 싶은 밤이다. 죽고 싶다. 왜 사는 걸까.... 내일 또 한 주가 시작되고 나는 출근을 할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일이 너무 많고 고객들은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만두면 돈은 누가 버나... 쳇바퀴 같은 인생... 기대되는 게 하나도 없다. 죽고 싶다.’

수는 삶에 애착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보며 아마 너무 지쳐서 그런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차 나왔습니다.”

“네 잘 마실게요.”

“그리고 혹시 베이글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제가 달래를 넣어서 베이글을 만들어봤거든요.” 

윤이 다가와 수에게 베이글을 권했다. 

“아.. 네 좋아요. 달래를 넣으셨어요?”

“네. 제가 요새 차에 곁들일 빵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이제 곧 봄이 오니까 봄나물이 들어간 베이글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달래를 넣어봤어요. 일명 봄봄 베이글이에요.”

“이름이 정말 멋진데요. 벌써 봄이 온 것 같아요.”

수는 생각을 접어두고는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알싸한 달래향과 고소한 베이글 본연의 향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맛있어요.”

“맛있으시다니 다행이네요. 휴직기간은 잘 보내고 계세요?”

“네 뭐… 근데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겠네요. 조금 쉬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활동들이 생각나실 것 같아요.”

“네. 근데 윤님, 윤님은 삶에 애정이 있으세요?”

“애정이요?”

“네 애정이요. 저는 인생에 기대되는 게 없거든요.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저희 엄마한테도 미안한데 근데 정말 인생에 기대되는 게 없어요.”

“음… 혹시 언제부터 그러신 거예요?”

“음 사실 그런 생각한 지는 몇 년 된 것 같아요.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현실을 받아들인 때라고 해야 하나..”

“그러셨군요.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으셨어요?”

“아, 네 그랬어요. 저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그 공부가 정말 재밌었어요. 그래서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경제적인 여건도 그렇고 상황이 좀 어려워서 그냥 석사만 졸업하고 취직했어요.”

“그러셨군요. 지금은 어떤 일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저는 IT회사에서 기술영업해요.”

“음.. 저도 잘은 모르지만 수님이 원하셨던 길과 지금 하시는 일이 멀어 보이기는 한 것 같아요.”

“네, 실제로도 그래요. 회사 다니면서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거든요.”

“아마 의무감에 계속 일을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삶에 애정을 많이 못 느끼셨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네, 저도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금 와서 뭘 바꿀 수도 없는 거고…”

수는 단념하듯 말을 했다. 

윤은 그런 수가 마음이 쓰였다. 

“저는 여기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수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 여기 오면 제 현실을 벗어난 듯한 착각이 들어요. 고요하고 고요하고 편안해요.”

수는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앞으로도 자주 와주세요. 고요하고 고요하고 편안하신 느낌 계속 가져갈 수 있게 노력할게요.

그리고요. 제가 이런 말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수님 말이에요. 이제 와서 바꾸기에 늦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인생 길잖아요.”

수는 윤의 말에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 


수는 휴직 기간 동안 정신과를 정기적으로 가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을 정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산책을 하고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찻집에 갔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수의 마음은 초조함에서 편안함으로 바뀌어갔다. 

휴직 한 달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수는 그날도 어김없이 찻집에 들렸다. 

수는 차를 마시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계속해서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수는 과거를 덮어두고 잘 떠올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휴직기간 동안만큼은 덮어두었던 과거를 꺼내서 현재를 이해하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수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수는 왜 현재의 삶에서 깊은 절망을 느끼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를 경제적으로 확실하게 책임져야 하고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나는 돈 벌려고 태어난 건 아닌데… 물론 나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어른이지만 나는 그 의무감에만 너무 짓눌린 것 같아.’ 

수는 그러한 과도한 책임감 속에 뭔가를 좋아하고 즐기는 여유를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일해서 돈을 버는 수만 있었다. 


‘이제라도 나 자신을 위한 자리를 조금은 내주어야 할 것 같아.’

수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직이 끝나갈 즈음 수는 몇 가지를 일단 시도해 보기로 다짐을 했다. 우선은 복직 후 인사팀에 면담신청을 해 연구소로 부서 변경을 하는 것을 논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지금 하는 일보다는 보수가 20-30% 정도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계가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수는 조금의 연봉 감소를 감수하고 조금은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사회학 책모임에 참여해 보기로 했다. 한 달에 한번 셋째 주 토요일에 만나는 모임이라 크게 부담되지 않았고 또 자신과 관심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민을 만나러 호주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민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또 한 번 만나보고도 싶었다. 

“윤님, 저.. 아마 다음 주부터는 당분간 찻집에 못 올 것 같아요.”

“어디 가세요?”

“네.. 저 친구 만나러 호주 다녀오려고요.”

“가까운 친구이셨나 보네요.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네, 다녀와서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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