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찻집을 연지 세 달이 지나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찻집에서 바라본 공원에서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벚꽃을 그리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 윤의 찻집은 여느 때처럼 한산했다. 윤이 창가 자리에 앉아 벚꽃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한 손님이 들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성으로 베이지색 야구모자에 흰색 면티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메리카노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찻집에서는 커피를 제공하고 있지 않아서요. 괜찮으시면 차를 한 번 드셔보시는 거 어떠세요?”
“아,, 그럼… 음.. 잠시만요.”
메뉴판을 둘러보던 여자는 이내 대답했다.
“루이보스티 따뜻한 걸로 한 잔 주세요.”
“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찻집에 온 여자는 은이다. 은은 은행원이다. 아니 은행원이었다.
은은 한 달 전 회사에 퇴사를 알렸고 오늘이 은의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창가 쪽에 자리 잡은 은은 오늘이 회사원으로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두려움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소속과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직이 되었다는 두려움과 이제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말이다.
“루이보스티 나왔습니다. 여기 제가 만든 초콜릿쿠키인데 같이 드셔보세요.”
“네 고맙습니다. 혹시 물이 있나요?”
“네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요.”
윤이 물을 한 잔 건넸다. 은은 물 잔을 받아 들고는 가방을 뒤적여 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알레르기 약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은은 약을 타러 내과에 갔다. 두드러기가 매일같이 올라온 건 1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야근을 하던 은은 목 주변에 두드러기가 난 것을 발견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일을 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저녁 내내 온몸으로 두드러기가 번져나갔고 은은 극심한 가려움에 저녁 9시 즈음 급하게 퇴근을 했다. 그날 밤 계속되는 가려움에 한 잠도 잘 수 없었던 은은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의사는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라며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해 주었다. 다행히 약은 30분도 안되어 효과가 나타났고 몸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또다시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약을 먹자 두드러기는 사라졌다. 그때부터 은은 매일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거르면 두드러기가 온몸을 덮어 은이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지 몰라 불안해진 은은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서울 대형병원 알레르기 내과를 찾았다.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원인이 뭘까요?"
"글쎄요.. 사실 두드러기의 원인은 워낙 다양해서 하나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어요. 알레르기 검사를 해봐도 딱히 원인이 되는 성분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네.. 언제 나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사람마다 회복기간이 달라서요. 3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일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편인가요?”
“네.. 좀 그렇기는 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
“일에서 스트레스를 좀 덜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제가 일단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인 것 같습니다.”
은은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며, 이제는 스트레스를 안 받으리라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은의 회사생활은 그 다짐과는 반대였다. 은이 일하던 은행은 지점당 영업이익 감소를 이유로 지점 통폐합에 들어갔다. 그런데 행장이 당장의 실적개선을 위해 무리하게 지점을 줄이고 인원을 줄이면서 지점에 남겨진 개별 직원들의 일은 더욱 늘어났고 KPI도 높아졌다. 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은의 바쁜 일상에서 두드러기는 이제 그만 좀 쉬어가라는 몸의 신호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난 1년간은 그 신호를 무시하며 회사 생활을 견디었던 것이다.
은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살 것 같아… 이런 고요함과 이런 느림이 얼마만인지…”
은은 홀로 속삭였다.
그러면서 은은 자신에게 사과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영업점으로 배치를 받았던 은은 2년여간 텔러 일을 하면서 하루종일 고객들에게 시달렸었다. 물론 대부분의 고객과는 마찰이 없었지만 하루에 두 명 혹은 세 명은 은에게 함부로 대하였다. 특히나 세 달 전 방문했던 한 고객은 그날 이후로 은의 머릿속에 자주 나타났다. 은행이 문을 닫을 무렵 급하게 은행을 찾은 이 남자는 예금 통장 개설을 요구했다.
“나 예금 통장 하나 만들려고.”
“네, 통장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반말을 하는 손님은 종종 있기에 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은 그날의 마지막 손님인 그에게 최선을 다해 절차를 설명하고 서류 작업을 도왔다. 마지막 절차로 손님이 통장 서명란에 도장을 찍자 은은 손님에게 인사를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손님은 갑자기 화를 냈다.
“아니 도장 뚜껑을 닫아줘야지 왜 안 닫아줘?”
“아, 그건 고객님께서 하시면 되실 것 같아서 따로 닫아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서비스직이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지. 그럼 도장 뚜껑을 내가 닫나?”
“.....”
“뭐 일을 이런 식으로 해? 여기 임원 나와보라 그래! 나 누군지 알아?”
은은 보통 자신이 잘못하지 않아도 고객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했지만 그날따라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은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 남자는 더 화를 냈다.
“당장 사과해. 너 진짜 가만 안 둬. 뭐 일을 이따구로 해”
결국 은의 상사가 와서 그 남자에게 사과를 했고 그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다음 날 그 고객이 민원을 제기하였고 부지점장은 이 민원으로 지점의 KPI에 문제가 생긴다며 은에게 화를 냈다.
“김은 씨, 솔직히 나도 그 고객이 요구하는 거 부당하다는 거 알아. 근데 이 민원 때문에 우리 지점 점수가 깎인다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있다가 고객한테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해. 그리고 민원 좀 취소해 달라고 해. 알았지.?”
“부지점장님, 근데 상황이 아시잖아요. 저 잘못한 거 없습니다.”
“아, 알지 알지. 근데 이대로 놔두면 우리 지점 점수가 깎인다고. 김은 씨도 승진해야지. 나도 승진해야 되고. 우리 다 먹고살자고 이 짓 하는 거자나. 그냥 눈 딱 감고 전화해.”
은은 본인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부지점장의 말대로 사과를 하고 민원 취소를 하도록 해야 했다. 그게 사는 길이었다. 은은 눈을 딱 감고 심호흡을 하고 그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주성 고객님. 저 어제 뵈었던 수성은행 김은 행원입니다. 어제 고객님 기분 상하게 해 드린 부분 사과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다니는 은행 직원들은 원래 예의가 바르거든. 도장 뚜껑 닫고 이러는 거 기본이라고. 알았어?”
“네 죄송합니다.”
“내가 진짜 원래 이렇게 안 넘어가는데 이렇게 전화해서 사과하고 하니까 봐주는 거야. 다음부터 이런 일 없도록 하라고.”
“네, 죄송합니다. 고객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오늘 제기하신 민원도 취소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민원? 그건 취소 못하지. 앞으로 주의하라는 경고신호인데, 그걸 왜 취소해?”
“민원 제기하시면 저희 지점이 좀 어려워져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민원 취소를 좀 부탁드립니다.”
“아, 지금 민원 취소하려고 나한테 사과하는 거구만? 나 민원 취소 못해. 끊어.”
은은 다시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지점장은 민원을 취소시켜야 한다며 결국 그 주 주말에 은을 데리고 그 고객 집 근처를 찾아갔다.
그 남자는 못 이기는 척 민원을 취소해 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고객은 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앞으로는 좀 더 싹싹하게 하라고. 여자가 싹싹한 맛이 있어야지”
남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젊은 여자에게 사회생활을 가르쳐야겠다는 말투로 싹싹함을 요구했다.
은은 싹싹하게 하라는 그 남자의 말이 역겹게 느껴졌다. 남자였다면 그런 말을 듣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그 남자가 민원을 취소하도록 설득하는 자리였다.
“싹싹하게… 네….”
은은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꼈다.
“그래, 싹싹하게.”
“네, 감사합니다. 고객님.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은 사과를 요구해도 모자랄 판에 사과는커녕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은은 불편 민원이 취소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이런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공포감이 들었다.
은은 사람이 싫어졌다.
한참을 앉아서 그날을 회상하던 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와주세요.”
윤은 부드러운 미소로 은에게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