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의 시간 Feb 28. 2024

고요의 시간

한동안 뒤척이다가 잠이 깬 은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6시였다. 이제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은의 몸은 출근에 익숙해져 있었다. 은은 동영상으로 요가 영상을 틀고 아침 요가를 했다.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고 요가 동작들을 하나하나 진행하니 몸도 마음도 정돈이 되는 것 같았다. 아침으로 가볍게 밥과 국을 챙겨 먹은 은은 찻집을 향했다. 은에게 어느새 찻집을 가는 것이 어떤 의식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따뜻한 오렌지루이보스티 하나 주세요.”

“네,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은은 책장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어떤 책들이 읽는지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은행을 그만뒀을 때의 해방감은 며칠이 채 가지 않았다. 어느새 그 해방감의 자리에 불안함이 꿈틀꿈틀 대고 있었다. 불안한 은은 핸드폰을 꺼내 은행앱을 열었다. 은행 잔고는 2,200만 원. 대출도 있었다. 학자금 대출은 다 갚았지만 전세자금 대출이 꽤나 남아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세가 아직 1년은 남아있어 전세자금을 당장 갚지는 않아도 된다는 정도였다. 채용앱을 열었다. 자신이 지원할만한 포지션이 있는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UX디자이너, 데이터 엔지니어, DB 엔지니어, 개발자, 기획자…’ 은에게는 낯선 직무들이었다. 은은 자신이 은행에서 했던 텔러 일은 전문성이 전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은행원인 자신도 은행 점포에 들러서 일을 처리했던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열에 아홉은 모바일앱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자신의 경력이 그다지 쓸모없었다는 생각에 은은 두려움이 들었다.  


“차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새 잘 쉬고 계신가요?”

네.."

".."

'아니요.. 잘 못 쉬고 있어요.”


잘 지내는 척하려던 은은 이내 사실대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윤이 물었다. 

“아 회사 안 가니까 뭔가 빨리 직업을 또 찾아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도 빨리 취직해야지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요.”

“흠… 정말 고민되시겠어요. 그래도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고민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회사를 다녔었거든요. 회사 다니면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볼 시간 같은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일하고 살아내느라 바빠서… 그런데 손님은 그런 시간을 가지신 거니까… 이렇게 젊을 때에 이런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거 되돌아보면 정말 그리우실 거예요.”

그런 생각은 못한 것 같아요. 불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 제 이름은 은이에요. 최은”

“저는 윤이라고 해요. 아참, 이 소금빵도 같이 드셔보세요. 제가 요새 베이커리를 배우고 있거든요.”

“네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은은 윤이 건넨 말들에 위로를 받았다. 돌이켜보니 살면서 이렇게 멈춰본 시간은 처음인 것 같았다. 은은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건 죽을 때까지 레이스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굼뜬 사람은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사회.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을 간다고 공부만 죽어라 했고 나름 인서울에 성공을 했다. 하지만 대학을 가고 나니 취업이라는 관문이 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죽어라 준비해 취업을 하니 이제 승진과 결혼이라는 관문이 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관문을 끝내 통과하지 못한 채 은은 레이스에서 내려온 것이다. 레이스에서 내려온 은에게 남아있는 것은 2,200만 원의 통장 잔고와 두드러기, 갑질했던 고객들에 대한 잔상 같은 것이었다. 


"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차를 마시며 은은 생각했다. 은은 방향을 잃었다. 방향을 빨리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과 이왕 잃은 거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잠시 있어보자는 생각이 같이 들었다. 

차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차는 은에게 흘러가는 대로 그냥 그렇게 있어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래, 잠시만 이렇게 있어볼래. 흘러가는 대로."

은은 차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은은 땅바닥을 보며 걸어가는 단발머리의 중학생을 보았다. 한창 좋을 나이에 어두운 얼굴로 땅바닥을 보며 걸어가는 아이를 보니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꽃샘추위가 있던 어느 저녁의 일곱 시 정도였을까. 중학교에 막 입학한 은이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은은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이미 엄마와 아빠가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난 후였던 것 같았다. 대개 엄마는 돈을 못 버는 아빠를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냈고 아빠는 그 말들을 받아내다가 마침내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그러면 질세라 엄마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은에게는 그런 날들이 꽤나 잦았다. 아빠는 밖에 나가고 없었다. 한바탕 싸우고 나면 아빠는 항상 밖으로 나갔다. 자기를 위한 공간이 이 집에는 없으니까. 안방은 엄마 차지였다. 조용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엄마가 안방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우리 이사 갈 거야."

"어디로?"

"저기 구지동 교회 있지. 거기 근처로."

"왜?"

"아빠가 삼촌 보증 서줬대. 돈도 못 벌면서 보증까지 서줬대."

"거기도 방 2개야?"

"응"

"그럼 뭐 달라지는 것도 없네."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없었던 은은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사 첫날, 이사 갈 집을 보고 은은 자신의 상황에 화가 났고 비참함을 느꼈다. 반지하에 어둑어둑하고 벽에 곰팡이가 피는 집. 반지하 현관문을 열고 지하 통로를 조금 지나면 은의 집 문이 나왔다. 통로에는 다리가 많은 벌레들이 드문드문 벽에 붙어있었다. 


"돈벌레야. 이거 보면 돈 많이 번대."

돈을 주지는 못할망정 돈벌레가 나오는 환경에서 살게 하는 아빠가 싫었고 혐오스러웠다. 이사를 온 후로 은의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은은 엄마와 아빠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배우지 못해서라 생각했다. 은은 잘살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구질구질하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서울 변두리에 있던 은의 고등학교에서는 한 해에 인서울을 하는 학생이 다섯 명 내외였다. 은은 노력 끝에 그 다섯 명에 들 수 있었다. 엄청난 명문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은 아는 학교를 갔다. 그 무렵 계속했던 은의 부모님도 반지하 집을 벗어나 사십여 년 된 연립빌라로 이사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방 2개의 작은 집이었지만 지하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전 14화 나를 구해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