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은이 눈을 뜨니 아직 오전 6시였다. 이제 출근을 안 해도 되니 은은 다시 잠이나 잘 생각으로 돌아누웠다. 은에게 도장뚜껑을 닫으라고 소리쳤던 그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차라리 소리를 질러버리고 화를 냈어야 했어. 그때 그냥 꾹 참고 바보처럼 있었던 게 너무 억울해. 나를 지키지 못했던 것 같아서…’
은에게 상처를 준 고객들은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은은 그 남자가 자꾸 떠올랐다. 그 남자는 자신이 변호사라며 소송을 진행하겠다고도 했다. 그는 은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했다. 부지점장과 그 남자의 집 근처로 찾아가 빌고 빈 덕분에 소송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은 그 남자를 떠올리면 분노가 일었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 은행을 그만두었기에 볼 일도 없는데 자꾸 분노가 일었다.
'그 인간 누가 죽여줬으면 좋겠어.'
잠이 깨버린 은은 밖에 나가서 좀 걷다 와야겠다 생각했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빵집에 들러 아침으로 먹을 빵을 좀 사 왔다.
그리고 과일과 빵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은 은은 어제 갔던 찻집에 다시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곳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또 와주셨네요.”
“네 그냥 또 오고 싶더라고요. 카모마일 티 한잔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은은 자리에 앉아 식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록빛을 가득 머금은 식물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티 나왔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아침 일찍 오셨네요.”
“네 제가 이제 일을 안 해서..”
“아 그러셨군요. 혹시 무슨 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저 은행원이었어요. 어제 날짜로 퇴사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이번 기회에 좀 쉬시면서 충전하시면 좋겠네요.”
“네. 고맙습니다.”
은은 다시 은행 생활을 떠올렸다. 악질 손님을 만난 다음날 출근을 한 은은 고객 대면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객 대면을 하지 않는 텔러는 있을 수 없었다. 꾸역꾸역 참아가며 일을 하던 은은 인사팀에 부서이동과 관련한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인사팀은 아직 2년 차인 은에게 경력이 부족해 부서 이동은 어렵다며 대신 회사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해 볼 것을 권했다. 또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상담하는 내역은 회사와 공유되지 않는다며 안심하고 이용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은은 회사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은은 고민을 하다가 다른 업계로의 이직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2년의 경력이 애매한 탓에 다른 업계로 가려면 신입사원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했다. 공채를 다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다른 은행으로 가면 좀 나아질까 해서 알아봤지만 2년의 경력을 가진 행원을 고용하고자 하는 은행은 없었다. 은은 자신에게 실질적인 선택지가 없는 것 같았다.
인사팀 면담을 한 그날, 은은 퇴근 후 초등학교 동창인 태나를 만났다. 태나는 중소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하고 있었다.
“태나야, 나 회사 다니는 거 좀 버거워. 출근하는 아침마다 두려워서 심장이 쿵쾅쿵쾅 해.”
“오늘도 진상 손님 왔었어?”
“아니, 오늘은 그런 고객 없었어. 그런데 매 순간 그런 고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니까 너무 긴장이 되고 사람이 무서워.”
“내가 널 이해 못 하겠니. 우리 카페에도 진짜 별별 인간 다오거든.”
“그렇지.. 아 나 어쩌면 좋을까…”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해. 그게 나만의 팁이야.”
“사무적으로 대하라고?”
“응, 친절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야. 친절하려고 노력하면 그게 상대방한테도 보이거든. 그 친절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때다 싶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달려드는 인간도 있다는 거야. 사무적으로 대하라는 건 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다는 걸 보여주는 방법이야.”
“아… 근데 은행원은 친절이 기본값이야. 차갑게 대하면 그것대로 또 민원이 생길 거야.”
“흠… 차라리 다른 일 알아보는 건 어때? 넌 그래도 학벌도 좋고 하니까 다른 회사 가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회사 가면 달라질까. 다른 업계 가려면 신입사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다시 해낼 자신이 없어.”
“어쩌냐 우리 은..”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은은 태나를 만나 마음속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그다음 날은 지점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워킹맘인 2명의 과장을 제외한 8명이 회식에 참여했다. 지점장과 과장 2명, 그리고 행원인 은 이렇게 4명이 한 테이블에 앉고 부지점장과 행원 3명 이렇게 4명이 또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김은 씨, 요새 회사 생활 어떤가?”
지점장이 물었다.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임원도 되고 그러지.”
“...”
은은 임원이 될 생각이 없었다.
“이번 분기에도 새로 나오는 신용카드가 있다고 하거든. 김은 씨 저번에 실적도 좀 안 좋았고 하니까 이번에 만회를 해보는 게 좋겠어. 그리고 사람이 이게 목표가 중요하거든. 목표를 낮게 잡으면 될 것도 안돼. 알지? “
“네"
“그러니까 이번에 100장 목표로 한 번 해봐. 이번에도 전행원 실적 이메일로 뿌린다고 하니까 우리 지점 잘하는 것 좀 보여주자. 알았지?”
“네..”
은은 숨이 막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은은 생각했다. 그래도 이만한 직장이 없다고. 나름 나인투식스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문화이고 여자에게는 2년 육아휴직도 주니까. 물론 은에게 결혼할 상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언젠가 출산을 할 수도 있으니 육아휴직은 좋은 복지라 생각했다. 그렇게 은은 꾸역꾸역 회사를 다녔다.
그러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따라 사람이 많아 대기줄이 너무 길었다.
“102번 고객님"
한 중년 여성이 번호표를 들고 은의 앞으로 왔다.
“지하철 카드 발급받으려고.”
“네 고객님, 신분증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
“아 아직 만 65세가 아니어서 발급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만 64세이시거든요. 그래서 세 달 후에 와주시면 저희가 발급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아가씨. 그냥 좀 해줘.”
“아 이게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 제가 드리고 싶어도 발급을 못 해 드려요. 죄송합니다.”
“아, 좀 해줘. 내가 일하러 다니거든. 매일 지하철 비용이라도 줄여야 먹고살 수 있다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내 친구들은 다 받는데 왜 나는 못 받아.”
“아 이게 기준이 만나이라서요. 세 달 후에 오세요. 그러면 만 65세 되시니까 그때 만들어드릴게요.”
“아니, 좀 해줘! ”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놀란 부지점장이 은의 자리로 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190cm의 훤칠한 키를 가진 부지점장이 그 고객에게 다가가 설명을 해주었다.
“고객님, 만 65세 이상만 카드가 발급이 됩니다. 고객님은 현재 만 64세라 아직 카드 발급이 어렵습니다. 세 달 후에 방문 주시면 저희가 카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부지점장의 말을 듣더니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수긍을 했다. 은과 부지점장이 말한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은의 말에는 반대를 했고 부지점장의 말은 수긍했다. 부지점장은 세 달 후에 다시 오시라고 다시 한번 말하며 그 고객을 은행 출입구로 안내했다.
“내가 세 달 후에 다시 올게요. 근데 저 여직원 말이야. 너무 눈빛이 싹수가 없네. 아주 그냥.”
손님은 은의 눈빛을 지적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은은 그의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날 밤 은은 집으로 가는 길에 소주를 한 병 샀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사들고 집에서 혼자 술을 들이켰다. 술 말고는 자기의 마음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또 태나에게 신세한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술로 풀고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술로 마음을 푼 저녁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은은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보았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날씨를 검색하려고 인터넷을 열었다. 검색창에 어제 검색한 단어들이 떴다. ‘수면제로 자살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은은 어젯밤에 자신이 이런 검색을 했던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섬뜩했다.
‘내 삶에 별다른 옵션이 없다고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일한 탈출구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니…’
은은 그날 출근을 하며 고민했다. 죽음까지 고민할 정도로 힘든 직장생활을 꾸역꾸역 참아내야만 하는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조금 쉬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출근을 하니 은은 퇴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 어려웠다. 당장 수입이 없어지는 게 두려웠다. 은은 선택을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퇴사를 할지 계속 다닐지를 매일 적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더 많이 나오는 쪽으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어떤 날은 퇴사를 적고 어떤 날은 계속 다니기를 적었다. 그렇게 2주가 흘러 은은 다시 메모장을 열어 그간 적은 것을 읽어보았다.
‘나의 투표 (퇴사 vs 계속 다니기)’
2/13 퇴사
2/14 퇴사
2/15 퇴사
1) 마음 건강
2) 이제 더 이상 괴롭게 살기 싫음
2/16 계속 다니기
1) 돈 없어서 위축되기 싫음
2) 무직인 게 싫음
2/17 퇴사
1) 일단 살아야 함
2/18 계속 다니기
1) 돈 필요함
2/19 잘 모르겠음
1) 돈 필요하고 일자리 중요하지만..
2) 그 직장은 나를 아프게 하는 곳임. 고객이란 존재가 너무 싫고 무서움.
2/20 퇴사
2/21 퇴사
2/22 계속 다니기
2/23 퇴사
2/24 퇴사
2/25 퇴사
2/26 퇴사 ‘
퇴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날이 10일, 계속 다니겠다는 결심을 한 날이 3일, 마음이 왔다갔다한 날이 1일이었다. 은은 자산관리앱에 들어가 통장에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했다.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는 금액이 있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 스스로가 떠나지 않는다면 괴로운 하루하루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자신을 구해줄 이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저.. 이 쿠키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과거를 떠올리느라 생각에 잠겨있던 은은 윤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윤은 다정한 얼굴로 은에게 쿠키를 건넸다.
“아… 네 고맙습니다.”
윤은 은에게 쿠키를 건네고는 새로 온 손님의 주문을 받기 위해 카운터로 돌아갔다.
은은 자신처럼 고용되어 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사업을 하는 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사업을 해보라고 누가 권한다면 자신은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업자금도 없었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매일 대면하는 게 두려웠다.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은에게 엄마가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너 선 볼래? 엄마 다니는 교회 집사님이 자기 조카 소개해준다고 해서.. 대기업 연구원이고 너랑 4살 차이 난다고 하더라고. 한 번 만나봐. 그 집 부모는 노후 준비도 다 됐대. 공무원이었었나 봐.”
“아.. 엄마 생각해 볼게. 근데 내가 요새 좀 바빠서.”
“일도 중요하지만 얼른 안정적인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응. 엄마 근데 내가 좀 바빠서 이번에는 안될 것 같아.”
“너 그러다 결혼 못한다. 뭐든 때가 있는 거라고.”
“....”
“그리고 맞벌이하면 애가 잘 안 생겨. 정집사네 딸도 몇 년째 난임치료받는데 애가 잘 안 생긴대.”
“.... 응, 연락할게. 나 지금 뭐 좀 해야 돼서 끊을게요.”
은은 전화를 끊었다. 은은 엄마에게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하게 되면 엄마는 다짜고짜 은을 다그칠 게 뻔했다. 은은 한동안 자신의 직업적 부분이 정리될 때까지는 엄마에게 은행을 다니는 척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