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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Mar 29. 2024

나만의 선택

어렸을 적 생각에 빠져있던 은은 갑작스러운 핸드폰 진동에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인이었다. 

'잘 지내지?' 

인은 은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2년 전 여행 중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하고 런던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냥 연락해 봤어. 다음 주에 너 생일이 자나. 미리 축하해요.' 

은은 인이 반가웠다. 인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들여다보았다. 능력 있는 남편과 인형 같은 아기와 인, 그 뒤로 보이는 거실 풍경은 인의 경제적 풍요를 보여주는 듯했다. 2년 전 인이 결혼할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만나자고 했을 때 은은 인이 과연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지 궁금해하며 자리에 나갔다. 그의 이름은 스티븐이었다. 단정하고 신뢰가 가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인과 10살 차이가 나고 직업은 독일 대기업의 엔지니어라고 했다. 박사과정을 하고 일을 하느라 늦게까지 결혼을 못했고 혼자 살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여행지에서 인과 만나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 인은 광고대행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인은 일을 그만두고 스티븐과 런던에 가서 살기로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곳에 가서 광고 관련 석사 공부도 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은은 인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물론 본인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결정이라는 생각도 했다. 은은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나라를 바꿔 사는 것은 리스크가 높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 남편이 제공해 주는 경제적 안정 속에서 적어도 돈에 대한 걱정은 없이 아이를 기르는 인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남편도 없고 직업이 없는 자신이 다소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곧 가진 것이 없기에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다시 회사라는 곳에 들어간다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은은 그 질문에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은은 처음에는 갑질하는 고객들 때문에 억울하게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낯선 사람들을 대면하는 일이 아닌 재무나 인사처럼 백오피스 일을 하면 회사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사실은 '견디는' 것이었다. 은은 매일같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공간으로 출근을 하고 그곳에서 최소 9시간을 있는 그 삶이 본인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은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은행이라는 대기업에 들어온 일련의 과정들에서 과연 온전한 자신의 결정이 있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당연히 수능이라는 것을 봐야 하고 인서울 대학을 가야 하고 대학생이라면 열심히 취업준비를 해서 대기업에 가야 하는 게 은의 생각이었다. 은의 세대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고 그들의 부모 세대 역시 자녀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과연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은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길을 정했다면 어떻게 살아왔을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를 다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에 다소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조금은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조금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은은 이후로도 회사를 가듯 찻집에 갔고 어느덧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대개 아침에 찻집을 갔고 그 후에는 요가를 배우러 갔다. 그리고 집에서 점심을 만들어먹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통장 잔고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회사생활을 안 하니 오히려 나가는 돈은 훨씬 줄었다. 

은행에서의 아침은 분주했고 시끄러웠다. 하지만 찻집에서의 아침은 고요했다. 은은 그 고용함과 느림이 좋았다.  

"저 오늘은 녹차로 할게요."

"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저.... 저 아마 내일부터는 못 올 것 같아요."

"아... 어디 가시나요?"

"네, 저 발리에 요가 배우러 가려고요."

"와.. 너무 좋으시겠어요."

"네. 쉬는 동안 요가를 배웠는데 그 시간만큼은 살아있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 싶어서요."

"네. 잘 생각하셨어요. 건강히 잘 다녀오셔요."

"네, 있다 집에 갈 때 또 인사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윤은 손님인 은의 평온한 표정에 마음이 놓였다. 윤은 은을 위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이 끓고 녹차 잎은 거름망에 가지런히 올려졌다. 고요하고 정갈한 차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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