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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Jun 06. 2021

강릉 당일치기

'택배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기다리던 책들이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는 택배회사의 문자.  달에 10만원씩 회사에서 커리어개발을 하라는 명목으로 돈을 지원해준다. 작년 중반까지는 대개 일에 도움이 되는 경제 경영 IT분야의 책들을 샀는데 대개는  읽지않고 집구석에 쌓아두기 일쑤였다.  책들은 코로나 시대에 경제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혹은 새로운 IT트렌드가 무엇인지 등을 다뤘는데 나는 그것들을 알아야했지만 도무지 알고 싶지가 않았다.


독서마저 의무적으로 해야하나 회의가 들었고  시간만이라도 내가 좋아하는걸 읽자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책들만 장바구니에 담아보니 경영경제IT  한권도 들어있지 않았다.  한권도... 대신 소설책과 잡지를 사게 되었다. 이번달도 저번달처럼 10만원으로 8권은 소설책, 그리고 1권은 잡지를 샀다.


1권의 잡지는 goeul의 '강릉'편이었다. goeul은 먹을거리를 통해 여행지를 알아간다는 컨셉으로 국내 여행지 한 곳을 정해 그 곳의 음식을 주로 소개한다. goeul 시리즈는 지금까지 세 권이 발행되었는데 각각 경주, 담양, 강릉을 다루고 있다. 마음으로 끌리는 곳은 경주였지만, 돌도 안된 아기를 기르는 우리 부부가 갈 수 있는 최대치는 강원도라는 생각에 강릉편을 고르게 되었다.


책들이 도착하자 소설들 속에 파묻혀있는 geoul 강릉편을 가장 먼저 손에 들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육아로 집에 갇혀있는 나에게 그 책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책의 표지는 핑크빛 파도가 넘실대는 모습이었다. 책을 열자 부록으로 강릉지도가 들어있었다. 지도에는 책에서 다루는 음식점들과 커피집들, 숙소, 명소 등이 한데 모여있어 왠지 그 지도 한 장이면 강릉을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언제갈지 모르니까, 버킷리스트 삼아서 지도를 여기 붙여놓자."

내가 말했다.

"우리 국내여행 가는게 버킷리스트씩이나 되어버렸네. 아기 낳기전에는 즉흥적으로 속초도 다녀왔었자나."

남편이 새삼 달라진 우리 상황을 말해주었다.

"근데 우리 진짜 언제 갈 수 있을까. 엄마한테 우리 아기 맡기고 토요일날 갔다가 일요일날 오면 어떨까?"

"그것도 방법이기는한데.. 그러면 월요일에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그르게... 월요일에 연차를 내야겠네. 근데 1박2일은 또 너무 짧은것 같아."

"그치? 우리에게는 최소 일주일은 필요해. 너는 뭐가 젤 하구싶어? 맛집 가기? 바다가기?"

"웅 나는 그냥 여행가는 그 설렘이 그리워. 근데 또 우리 아가 두고 우리끼리 여행가는게 뭔가 죄책감이 느껴져."

"웅 우리 아기가 '너네 나 두고 어디가' 말할 것만 같아."

몇차례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당분간 여행을 가기는 힘들다는 (어쩌면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 그냥 오늘은 여기가 강릉이라고 생각하자."

남편이 말했다.

"여기가?"

"응, 유투브에서 강릉파도소리를 검색해서 틀어놓자. 그리고 와인에 우리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만들어 먹자."

말을 마친 남편은 재빨리 파도소리를 검색했다. 강릉의 파도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가 않았다. 찾다찾다 우리는 보라카이 해변을 배경으로 한 파도소리를 켰다.

"그래, 여기가 강릉이라고 생각하자. 나 와인이랑 과일 사러 다녀올게."

나는 장을 보고 왔고 그때부터 우리의 강릉여행은 시작되었다. 비록 베란다밖은 아파트들이 불쑥불쑥 서있는 씨티뷰였지만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은 에메랄드빛 해변을 보여주었다. 눈을 감고 듣는 파도소리는 우리를 강릉으로 보내주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남편이 만든 파스타를 먹었다. 올리브유, 링귀니면, 토마토, 어린새싹, 양송이 버섯, 치즈, 소금으로 만든 남편의 파스타는 황홀감을 주기도 하였다. 한 시간을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길었던 점심이 끝나고 남편은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트름을 시키고, 나는 아기 젖병을 씻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이 되자, 낮의 해변 화면이 어색해보이기 시작했다. 검색을 해서 노을이 지는 해변으로 화면을 바꾸었다. 그러자 다시 또 여행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때의 주말 저녁처럼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아기의 옷을 빨래하고 집청소를 하고 책을 읽기도하고 핸드폰을 하기도 했다. 나는 정현아 작가의 '달의 바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는 우주비행사도 아니면서 우주비행사인척 하는 고모가 등장한다. 나는 그 캐릭터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 상상이 고모 혹은 고모의 엄마의 삶을 조금이나마 풍부하게 해준다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강릉에 왔다고 상상하고 토요일을 보내는 우리처럼.


보통의 주말에 비해 바뀐 건 단지 파도소리를 켜놓은 것 뿐이었지만 우리는 강릉에 있었고 맛있는 식사를 했고 파도소리를 즐겼다.


"오늘 여행 즐거웠어."

"나도! 다음에는 어디로 놀러갈까?"

그렇게 우리의 토요일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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