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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미 Mar 03. 2024

지금은 삼겹살!

변덕스러운 나를 인정하기

인간은 누구나 변덕스럽다

비 오는 날에 먹는 파전을 좋아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에는 쌈밥을, 간헐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다 맛있는 게 먹고 싶어지면 부리또볼을 찾고 한 가지 요리로 다양한 변주를 즐길 수 있는 샤부샤부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이 많아서 점심 메뉴 고르는 건 일도 아니다. 좋아하는 음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라면 몇 시간이고 떠들 수도 있다. 달걀 넣는 파전이 맛있는지 아닌 파전이 맛있는지 100분 토론을 펼칠 수 있고 쌈밥은 다양한 재료를 한 입에 와앙 넣고 오물거리는 걸 좋아하는데 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거나 부리또볼을 처음 먹을 땐 고수향이 거북했지만 이제는 고수 없는 부리또볼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이야기 따위로 말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해 줄 수 있는데 ‘그래서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라는 질문에는 말문이 턱 막힌다. ‘가장’이라는 수식어 앞에서는 종종 갈피를 잃는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 음식만 먹고 평생 살 수 있을까?’로 자연스레 바꿔 생각하는데 어떤 음식을 갖다 대든 그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평생 파전만 먹고살 순 없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내가 멕시코 사람도 아니고 평생 부리또볼만 먹고살 순 없지’ 하며 좋아하는 음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될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엔 ‘못 고르겠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딱 한 가지로 가장 좋아하는 걸 고를 수 있을까? 가장 좋아한다는 건 어쩐지 확고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큰 결단을 내려서 정말 그 음식 하나만 평생 먹을 수 있을 때 확정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걸 고르든 특정 음식 하나를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는다고 해서 누군가 나에게 평생 그것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미션을 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극단적인 성격은 괜한 ‘걱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취향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데 덜컥 이걸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못 박아버려도 될까? 하는 걱정. 지금은 삼겹살이 좋아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말했는데, 내일은 쌀국수가 가장 좋아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 그렇다면 삼겹살을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 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삼겹살이라고 이야기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바뀐 취향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별의별 걱정이 다 든다. 그러다 결국엔 말하기가 힘들어지는 거다.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성격과 걱정 많음이 겹쳐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만든다. 누가 그것만 평생 먹으라는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에게 챌린지를 주는 걸까?


어쩌면 명확해지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취향을 가진 소나무 같은 사람이고 싶어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평생’ 좋아하는 굳건한 사람이고 싶어서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사실 나는 오늘 좋아하는 게 내일은 싫어지고, 어제 싫어했던 게 오늘은 좋아지는 변덕스러운 사람이어서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명확하고 선명한 색깔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그럼 너 평양냉면만 평생 먹고살라고 하면 살 수 있어?’ 질문했다. 친구는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당연히 아니지!’라고 답했다. 아니구나, 당연히. 당연히 아니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평생’을 보장하지 않더라도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이라는 단어를 ‘평생’으로 바꾸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취향이라는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당연히’ 인정하기로 했다. 인정하기 싫었던 변덕스러운 나를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물으면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내일은, 모레는, 평생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삼겹살이 가장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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