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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미 May 18. 2024

낭만 한 방울, 용두

현실주의자의 낭만 쥐어짜기

우리 용두동, 낭만 없는 동네 아닙니다

헬스장에서 PT를 받아본 사람은 알 거다. 회사에 스트레스 주는 사람은 없는지를 물으며 맵•단•짠 음식을 먹는지 안 먹는지 감시하고 주말 일정을 물으며 술 약속은 없는지 은근슬쩍 관찰하는 트레이너를. 헬스장이랑 집은 가까운지, 걸어서 오는지, 차를 타고 오는지를 물으며 넌지시 운동량까지 체크하는 아주 주도면밀한 트레이너의 수법도 있다.

그날도 트레이너 선생님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나는 답했다. 숫자를 셀 때 오늘 날씨나 입고 온 옷, 근육통의 정도 등 잡담을 섞으며 숫자를 천천히 세고, 다섯, 다섯, 여섯, 하며 셌던 숫자를 또 넣어버리는 선생님을 원망 섞인 눈으로 쳐다보며 팔을 열심히 움직였다. 선생님이 숫자를 세면 팔을 움직이고, 선생님은 장난을 치고 나는 헥헥거리는 평범한 운동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천천히 숫자를 세며 집이 어디인지를 물었고, 헬스장에서 10분밖에 안 걸린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당연히 나를 서울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이 동네에 계속 살았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답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고, 그전에는 용두동에 살았다고. 본가는 울산이고 서울에서 처음 살았던 곳이 용두동이라고. 그러자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며 본인 집도 용두동이라고 하고선, 말을 덧붙였다.

"서울에서 제일 낭만 없는 동네에서 살았네요?" 그 말을 듣곤 아하하, 웃으며 그냥 넘겼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낭만 없는 동네, 그 표현이 마음에 콕 박혔다. 사실 용두동은 서울살이의 로망이 담긴 동네는 아니었다. 동네 이름부터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인 데다 유명한 카페나 힙한 음식점 대신 노포 식당이 더 많았고, 양식이나 일식당보단 백반집이 더 많았다. 유명한 외국 제품을 파는 그로서리스토어 대신 지방에도 여럿 있는 커다란 대형 마트와 함께 한약재 골목이 코 앞이었고, 동네는 젊은 사람보다 어르신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내내 동네에 정을 붙이기보다는 성수, 홍대,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서울 곳곳을 탐방하는 걸 더 즐겼다. 서울살이를 원하며 꿈꿨던 요란한 모습의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각양각색으로 열리는 팝업 스토어, 뮤지컬과 연극,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생활과 가까운 동네도 아니었다.

그래, 솔직히 낭만 없는 동네였다.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른 첫 동네를 낭만 없는 곳으로 낙인찍으면 내가 낭만 없는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났다. 이 집을, 이 동네를 선택하면서 고려했던 다양한 이유들 중 '낭만'은 선택 사항에 없었다는 것이 싫었다. 서울에 대한 로망을 잔뜩 안고 지방에서 올라온 내가 낭만은 잊은 채 현실과 타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증금과 월세, 관리비는 얼마인지, 집 근처에 약국이 있는지,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마트가 있는지, 인근 파출소가 있는지, 근처에 편의점은 몇 개인지, 건물에 벌레는 없는지, 건물 청소는 얼마나 자주 하는지 등 온갖 조건을 다 따져 들어온 집인데 그 많은 조건들이 지독하게 현실적인 것들이라 씁쓸했다. 내가 낭만을 모르는 현실주의자가 된 것 같아서, 낭만 없는 동네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용두동을 변호할 거리를 찾아냈다. 일하면서 느꼈던 삭막함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 냄새나는 골목이 있었고, 서울의 상징인 청계천도 가까웠다고. 집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동네였다고.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고 싶었다. 현실에 부딪혀 낭만을 잃더라도 악착같이 찾아낸 낭만을 꼭 쥐면서. 나, 그렇게 낭만 없는 사람은 아니지? 할 수 있도록. 다음에 헬스장에 가면 꼭 당당히 말해야지. ‘우리 용두동, 낭만 없는 동네 아닙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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