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싫어하는 인간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법
도망가자.ᐟ
직장인은 일주일에 퇴사를 몇 번이나 생각할까? 출근하기 전에 한 번, 점심 먹고 두 번, 회의할 때 세 번…. 그렇게 쌓이면 일주일에 최소 30번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모든 직장인이 바라던 퇴사를 했다. 전 직장은 디지털 광고 대행사였는데 대행사 특성상 광고주의 일정에 따라 일이 움직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광고주의 말이 곧 법인 이 회사에서 자율성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 업종에서 쉽게 지치곤 하는데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광고주가 잘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주는 일이 성취감이 컸다. 야근을 해도 언젠가 끝날 일이라는 것이 자명했으므로 막막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때때로 늦은 밤 퇴근을 하면서 주변 지인에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면 ‘그래도 네가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덕분에 우리나라가 굴러가는 거야~’ 하며 우스갯소리를 듣는 것도 꽤 좋았다. 업무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성취감을 자주 느낄 수 있어서 따분한 걸 못 견디는 나에겐 잘 맞는 직업이었다. 퇴사의 이유가 ‘일’ 때문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대외적으로는 몸이 아파 쉬고 싶어서 퇴사를 결심했다고 이야기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속에 더 깊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으레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팀원들과의 불화, 그게 퇴사 이유였다. 회사를 1년 반 정도 다니면서 팀장님이 네 번 정도 바뀌었다. P 팀장님 퇴사와 함께 팀이 해체되어 K 팀으로 이동했고 K 팀장님도 퇴사를 하면서 새로 오신 B 팀장님과 일을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세 번의 팀장님을 만났고 그러다 또 회사 내부 사정으로 팀이 바뀌었다. 마지막 팀은 E팀장님과 H과장님, 나 셋이서 꾸려진 팀이었다. 기존엔 적어도 5명, 많으면 9명의 팀원들과 함께 일을 했던 터라 이런 소규모의 팀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사실 팀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어려웠다. 인턴을 제외하면 이 회사가 첫 회사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거나 좋게 봐주었으므로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이 썩 힘들지 않았다. 눈칫밥 27년 차의 몸에 밴 사회생활로 어디 가서 미움받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원래 내 지론은 ‘이유 없이 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만들어 주자’인데 돈 받고 일하는 회사에서 그럴 순 없었다. 이유 없는 미움에 대응하는 방법을 몰라서 미움받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팀장님과 과장님 눈치를 살피며 일했다.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팀장님의 기분 살피기였다. 그는 기분이 곧 태도가 되는 사람이라 예쁜 옷을 입고 출근하면 기분이 좋은 날이었고 무난한 옷을 입으면 저기압이라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광고주와 통화를 많이 하는 날도 대체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되도록이면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일했다. 시키지 않은 일도 거들어가며 도울 일이 없을지 여쭤보았고 점심시간엔 과장님이 좋아하는 음식 중, 팀장님의 선호를 고려하는 메뉴를 선정하면서 회사에서 진짜 나의 모습은 점점 지워져 갔다. 그렇게 희미해지는 중이었는데도 그들 눈에는 거슬렸나 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조언을 구하면 모르는 걸 말하는 태도가 왜 그러냐, 이런 것도 알아서 못하냐, 스스로 알아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냐며 핀잔을 들었고, 야근을 하면 회사 일 혼자 다 하는 줄 알겠다며 업무 속도가 왜 그렇게 느리냐고 타박을 받았다. 눈치를 보면서 장난에 맞장구를 치면 ‘나는 선미 씨 기죽는 게 좋아요’하는 말을 듣고, 방어적으로 행동하면 일하는 태도가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들었다. 앞으로 어떤 태도로 일하는 게 좋을지 과장님과 상담을 하면 그 이야기가 고스란히 팀장님 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자칫 업무적으로 실수를 하는 날이면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하며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비난을 들었다. 혼자서 결정하면 ‘왜 나한테 상의도 안 하고 선미 주임 마음대로 결정해요?’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팀장님에게 여쭤보고 결정하면 ‘이런 건 선미 주임이 알아서 좀 할 수 있지 않아요?’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콤한 회사 생활이었다. 차라리 매일매일 못되게 굴었으면 곧바로 그만두었을 텐데, 못되게 군 다음날이면 이것저것 선물을 줬다. 본인이 잘 쓰고 있는 헤어 오일, 건강에 좋은 콤부차와 영양제, 맛있었던 떡 같은 것들. 그래서 사람을 마냥 미워하기도 어려웠다. 본인의 잘못을 직접 사과하지 않고 대충 행동으로 때우는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회사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날은 유독 집안의 모든 것들이 거슬렸다. 달라졌을 리 없는 집의 크기부터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 무소음 시계의 태엽 소리까지. 미세하게 들리는 태엽 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한숨을 쉬며 건전지를 빼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시계 건전지는 단숨에 빼버려 놓곤 냉장고 코드를 뽑을 용기는 안 났다. 녹아버린 냉동식품을 처리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얼마나 예민하면서도 우스운 인간인지 그때 알았다. 시계 배터리를 뺀 것처럼 나의 감정 배터리는 그렇게 쉽게 빼놓고 팀장님의 틀린 소리를 짚어 줄 용기는 없는 모습이 냉장고 소리에 귀를 막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퇴사하겠다고 팀장님께 이야기했다. 냉장고 코드는 뽑을 수 없지만 팀장님과의 관계는 끊어낼 수 있으니까. 퇴사하는 게 그냥 피하는 걸까 봐, 도망치는 걸까 봐 참고 있었는데 그날의 눈물로 깨달았다. 힘든 일을 꾹 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걸. 그렇게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이 하나 더 늘었다. 빠르게 도망치기!